이라영 집필노동자
‘애국가’ 가사에는 국가의 지향성이 없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나라 만세이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자는 맹목적 애국이 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를 사랑하려면 ‘실성’해야 한다. 사랑이 원래 맹목적이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있다. 국민에게는 무조건적인 애국을 강요하면서 국가와 정부는 과연 국민을 무조건 사랑하나?
원제는 <토착민들>(Indig<00E8>nes)이지만 영어 제목을 번역하여 국내에 개봉했던 프랑스 영화 <영광의 날들>은 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과 식민국가 출신 군인 간의 차별을 다뤘다.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나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 아프리카 토착민 군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프랑스 정부는 병사를 모집하기 위해 이 토착민들에게 ‘프랑스 국민’이라고 꼬드겼지만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금 차별을 했다. 식민지 국민은 쓰고 버려지는 총알받이였을 뿐이다. “독일군의 총알은 우리(토착민)를 차별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명대사다. 그들은 목숨을 나눴으나 보상받을 자격은 박탈당했다.
2006년 칸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공개된 뒤 당시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도 관람했다.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시라크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알제리와 모로코를 비롯하여 23개국에 흩어진 과거 식민지 출신 참전 용사 8만명에게 프랑스 군인과 동일한 연금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자신도 알제리에서 군복무를 한 경험이 있는 시라크에게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 늦은 뒷북이긴 하지만 늦게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면 다행이다. ‘하는 척’이든 뭐든 이렇게라도 지도자가 마음이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면 최악은 아니다.
<서편제>를 관람한 김영삼의 문민정부 이후로 임기 중 대통령들의 극장 나들이를 공공연히 볼 수 있다. 대통령들은 영화에 대해 한마디씩 말을 보태고, 때로는 다른 정치인들도 공식 석상에서 영화 감상평을 늘어놓는다. 정치인이 영화를 보고 반드시 영향을 받아서 좋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상상력이 너무 딱하고 답답하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과거 한나라당 사무총장 시절 <웰컴 투 동막골>을 보고 당직자회의에서 뱉은 말을 기억한다. “인민군은 휴머니스트처럼, 국군과 미군은 전쟁광처럼” 그렸다고 비판했다. 많은 이들이 국가주의에 사로잡혀 영웅서사를 강조하고, ‘종미’의 관점으로 아무데나 반미라는 낙인을 찍곤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전에 <빌리 엘리어트>를 인상 깊게 보았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의 행적을 보면, 그 영화에서 광부인 빌리 아버지를 통해 노동자의 삶을 가혹하게 짓밟는 정부의 정책을 봤으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역경을 극복한 위대한 빌리’에게 마음이 갔을 테고 이 위대한 개인이 국가의 훌륭한 자원이라 여겼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아직 80년대의 문턱도 넘지 않은 듯 온 마음이 꼿꼿하게 ‘그때 그 시절’에 고정되어 있다. 영화 <국제시장>을 언급하며 그가 내세운 것은 역시나 애국심일 뿐이다.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면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배례’를 하는 사회를 그는 그리워한다. 강제성에 길들여진, 두려움이 내재된 습관을 사랑이라 착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임기를 2년도 채우지 않았다. 반도 안 왔는데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나 했는데 그게 단지 수많은 사건 사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통령과 국민 간에 시차가 있다. 21세기의 시민이 20세기의 영광스러운 독재시절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대통령을 보고 있자니 1년이 10년 같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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