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은사께서는 “나를 ‘교수’라고 부르지 마라”고 가르치셨다. 교수는 직함일 뿐이고, 학문을 전수하는 자는 ‘선생’이라 일컬어야 옳다고 말씀하셨다. 기자 선배들도 존경하는 학자를 ‘교수님’보다 ‘선생님’이라 칭하라 일렀다. ‘선생’이란 말이 더 격이 높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지금도 매번 갈등한다. 상대가 특정 호칭을 불쾌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이를 없애려고 ‘선생님’과 ‘교수님’이란 호칭을 섞어 쓰는데, 여전히 조심스럽다.
최근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뒤 학계에서 논란이 된 일화가 있다. 비행기 1등석에 앉아 있던 한 대학교수가 승무원이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교수님’이라 하지 않는다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무엇이 맞는 표현일까? 한 교육학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교수를 ‘선생’이라 부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국립국어원도 교수를 ‘선생’이라 불러도 좋다고 답했다.
충격적인 것은 어느 비정규직 교수의 말이었다. “시간강사를 구분해 ‘선생’ 또는 ‘박사’라고 부르는 교수들이 많다. 학생들도 강사들만 ‘선생님’이라 칭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성적 이의신청을 할 때는 ‘아무개 시간강사님’ ‘비정규 강사님’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제 딴에는 정확하게 부른다고 하는 말일 테지만, 학생들이 교수 사회의 차별을 내면화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그는 풀이했다.
‘교수’를 가리키는 ‘프로페서’라는 단어는 ‘고백’이라는 뜻에서 출발했다. 인문정신은 고백과 증언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서보명, <대학의 몰락>) 하지만 교수들을 보며 실망할 때가 많다. 관료나 정치인이 된 뒤 자신이 논문에 쓴 주장조차 버리는 ‘폴리페서’들, 위계를 미끼로 제자에게 성추행을 하거나 연애를 하자며 을러대는 교수들, 재벌의 전횡을 눈감아주고 대가를 받는 교수 출신 사외이사들, 정부의 잘못된 사업에 풍각쟁이가 되어 혹세무민하는 학자들…. 이런 자들을 떠올리면 현실을 증언하는 ‘강사’들이 진정 교수답다.
‘고백하는 자’로서 참된 스승은 후생가외(後生可畏)를 되새긴다.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이 말은 뛰어난 인물이 될 후배는 가히 두려운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대학과 거리가 멀다. 이른바 ‘명문 학부’나 ‘미국 박사’ 중심의 교수 채용, ‘학파’라기엔 어이없는 주류의 패거리 문화 때문에 실력 있는 학자들이 나라 안팎에서 떠돌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장탄식이 나온다. 외국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땐 반가우면서도 씁쓸하다. 우리 인재를 기껏 키워 남한테 넘겨주게 된 까닭이다.
자질이 미심쩍은 일부 겸임교수·초빙교수까지 ‘교수’로 예우하면서 정작 자격이 충분한 이들만 배제하는 건 아카데미아의 엄격함이 아니다. 그냥 차별이다. 엄정하게 따지자면 이런 ‘후생’의 현실을 고백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선생’이요 ‘교수’일 것이다. 조선시대 ‘교수’는 지방 유생을 가르치는 종육품 벼슬이었다. 벼슬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은 교수도 선생도 아닌 그저 ‘벼슬아치’다. 후생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치워야 마땅한 학계의 걸림돌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선생’은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 말고도 학예가 뛰어난 사람, 어떤 일을 잘 아는 사람을 모두 포함한다. 지위고하, 나이불문 격을 높여 ‘선생’이라 일컬을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에서 비정규직 교수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도 나름 옳다. 다만 차별적인 호칭으로 ‘교수’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들이 ‘교수’와 ‘선생’의 자격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이유진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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