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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펜 뒤에 있는 총 / 이라영

등록 2015-01-28 18:41

이라영 집필노동자
이라영 집필노동자
장률 감독의 <망종>은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최순희라는 여성의 삶이 일상에서 어떻게 ‘테러’ 당하는지 건조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삶을 휩쓸고 지나가는 크고 작은 재난들을 보여준 뒤 영화는 마지막에 최순희의 ‘한 방’을 터뜨린다. 소외된 자의 분노가 어떻게 폭발하는지, 김치를 팔던 평범한 여성이 어떻게 ‘김치 테러리스트’가 되는지 보게 된다. 장률의 미덕은 극 중 어느 인물에게도 선악의 이분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순희의 삶을 담담히 지켜볼 뿐 그녀를 옹호하지도 않는다. 다만 폭력을 사유하게 한다.

테러의 생성 배경을 분석하는 일이 테러를 정당화하는 태도는 아니다. 테러는 물론 나쁘다. 그러나 연쇄살인 앞에서 ‘범죄와의 전쟁’이나 ‘생명 존중’만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파리에서 있었던 테러 이후 순식간에 내 일상은 “나는 샤를리다”로 뒤덮였다. 이 현상이 시민들의 자유로운 애도 차원에만 머물렀다면 괜찮았겠지만 공공기관에 내걸린 “나는 샤를리다”는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파리 시청에는 “우리는 샤를리다”가 커다랗게 내걸렸고 많은 국공립 기관의 누리집과 건물에서 계속 이 상황을 맞닥뜨려야 한다.

“나는 샤를리다”가 공식 입장이 되어버리면 이 구호는 더 이상 애도와 테러 규탄의 의미만 가질 수는 없다. 사건의 배경을 바라보는 프랑스 정부의 시각과 앞으로의 정책 지향을 시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종, 종교, 계층, 언론 자유 등의 주제가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는 이 ‘어려운’ 사건의 중심에 아주 깔끔하게 ‘표현의 자유’가 공화국의 수호신처럼 내려앉았다. 그러나 ‘공화국의 가치’인 자유는 실제로 수많은 모순에 기대고 있다.

공화국의 가치가 늘 표현의 자유를 수호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은 상당히 위선적이다. 1961년 파리시는 알제리인에게 야간통행금지 조처를 내렸고, 이에 항의하는 비무장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사망자만 200여명에 이르는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끔찍한 알제리인 학살을 담은 다큐멘터리 <파리의 10월>은 1962년 만들어졌으나 이내 상영이 금지되었다. 학살 이후 무려 50년이나 세월이 흘러 2011년 10월에 공식적으로 극장 개봉을 했다. 어떤 분노는 ‘지금 당장’ 정치적 의제로 만들지만, 어떤 분노는 오랜 세월 묵살당한 뒤 아무도 책임질 필요 없는 시절이 오면 ‘과거의 역사’로만 소환한다. 박제된 분노.

‘아파르트헤이트’, 프랑스 총리 마뉘엘 발스가 얼마 전 뱉은 이 단어는 다소 선동적인 감이 있긴 하지만 비로소 사회의 차별을 고백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54%의 프랑스인이 “프랑스에 아파르트헤이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기도 했다. 프랑스에는 “사회, 민족, 지역적” 아파르트헤이트뿐만 아니라 표현의 소외도 명백히 존재한다. 겉으로는 표현의 자유와 다원주의를 외치지만 그 표현과 다양성의 기준을 꾸준히 국가가 간섭해왔다. 예를 들면, 마호메트(무함마드)를 조롱할 자유는 존재하지만 정교분리 원칙이라는 명목으로 공립학교에서 여학생들은 2004년부터 히잡 착용을 금지당했다. 종교의 자유는 제한적이면서 이 종교를 조롱할 자유는 있다면, 이미 이 자유의 주체는 결코 ‘모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표현도 일종의 자원이다. 목소리의 분배를 고민하지 않고 목소리의 자유를 외친다? 누구의 목소리? 이번 테러는 펜과 총의 격돌이 아니었다. 펜 뒤에는 더 많은 총이 지켜주고 있다. 이 총들의 지지를 받아 펜은 우아하게 문명이 되어 있을 뿐이다. 펜의 자유는 총이 가진 힘에 따라 그 범위가 결정된다. ‘말’의 자유를 수호하고 싶다면 그 말 뒤에 있는 힘의 불균형을 모른 척하면 안 된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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