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여성들은 배움에서 소외돼왔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여성이 성경을 읽을 때조차 남편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서구 여성들이 스스로 책을 선택해 읽는 자유를 누리게 된 건 19세기 들어서였다.
조선시대 출판을 관장한 국가는 <삼강행실도> 열녀편을 보급했다. 남편을 따라 죽은 부인들의 이야기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관리하려 한 것이다. 여성은 남성 지배층이 편집한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받았다.(강명관, <열녀의 탄생>)
최근 발간된 <아단문고 미공개자료총서 2014>는 개항 이후 여성들의 ‘앎’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1908년 <녀자지남>에서 여성은 처음 근대 잡지의 주요 필자로 등장했다. 온건 좌파 성향의 잡지 <여인>(1932)을 보면 신문을 보거나 주먹을 쥐고 거리에 나선 여성의 그림이 나온다. <현대여성> 1933년 2월호는 로봇에 올라탄 엄마가 횃불을 든 모습을 표지에 실었다. 여성의 공부와 발언이 서서히 시작됐던 시기다.
그 뒤 많은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게 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 단절’과 함께 ‘공부 단절’도 겪어야만 했다. 자녀 교육은 엄마들의 가장 큰 의무가 됐고, 엄마들도 자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사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이주하는 ‘초국적 맹자 엄마’도 여전히 적지 않다.
그런데 요즘 새로운 엄마들이 생겨났다.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엄마들이다. 그것도 어려운 인문학에 푹 빠졌다고 한다. 취직에 도움 되지 않는다며 대학에서도 외면하는 이런 공부를 왜 할까? 어느 40대 엄마에게 물었더니 “인식을 끝없이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순수한 ‘앎’을 찾아 공부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출간 뒤 조용히 입소문을 타고 있는 책 <공부하는 엄마들>을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수준이 높다.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이들은 글쓰기와 사회과학은 기본이요, 동서양 고대부터 현대 철학까지 섭렵한다. 주변에서는 그럴 시간에 아이들 성적이나 관리하라는 충고를 쏟아낸다고 한다. 책에서 엄마들은 이렇게 답했다. “공부하여 변화된 나는 어제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책깨나 읽은 사람들은 시끄럽다. 공부하면 의문이 생기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게 되면 가만있을 수 없어 고분고분한 대열에서 이탈하게 된다. 물음을 가진 엄마들은 낙인찍히고 억압당하기 일쑤다. 권력에 맞선 한 엄마의 투쟁기를 다룬 영화 <체인질링>은 대표적이다. 아이를 잃어버린 뒤 가짜 아들을 데려다준 경찰에 저항하자, 그들은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엄마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린다. 실제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지난 2008년 촛불집회 때도 거리에 나온 엄마들은 무더기로 수사기관에 소환되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뒤 침묵시위를 한 엄마들도 고발당했다. 보수단체들이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에게 ‘아동학대죄’를 물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엄마들은 세상 이치를 가장 잘 꿰고 있는 사람들이다. 최강 소비자 집단이자 국가의 정책 변화도 민감하게 알아챈다. 이제 그런 엄마들이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삶이 불안해졌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고 발언한다. 공부하는 엄마는 위험하다. 하지만 그들이 ‘어제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면 사회도 그렇다.
여전히 비난의 목소리가 있다. 재취업에도, 자녀 교육에도 보탬이 안 되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고. ‘공부하는 엄마들’은 책에 이렇게 썼다. 하필왈리(何必曰利). 어째서 이익을 따지느냐. 맹자가 양혜왕에게 이(利)보다 인의(仁義)가 중요하다며 한 말이다. 엄마들이 세상에 던지는 준엄한 꾸짖음이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이유진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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