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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배운 녀자’ 그 이후 / 박권일

등록 2015-02-02 18:39

인터넷에서 ‘탈김치’라는 말을 종종 본다. ‘김치녀’는 ‘능력도 없으면서 남자 등골 빼먹는 젊은 여성’이다. ‘탈김치녀’는 그런 김치녀에서 벗어난 이른바 ‘개념녀’를 뜻한다. 어휘의 유별난 고급스러움 덕에 감 잡은 독자도 계시리라. 맞다. 일베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이다. 7년 전, 그러니까 2008년 촛불시위 당시 ‘개념녀’를 자칭하는 말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배운 녀자’다.

‘배운 녀자’는 ‘김치녀’ ‘된장녀’처럼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을 타자화하는 말과는 태생이 달랐다. 그것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참여하는 여성들이 자부심을 담아 스스로를 호명하는 단어였다. 그 말을 처음 들은 순간, “우리들은 정의파다”라고 외쳤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떠올라 조금 울컥했더랬다. 그러나 끝내 환호할 수는 없었다. 아마 학력이나 학벌로 여성을 차별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테다. 그럼에도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했던 건 ‘그럼 못 배우거나 덜 배운 여자들은 누구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운 녀자’라는 말에서 느낀 불편함은 사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던 나 자신에게 느꼈던 불편함이기도 했다. 즉 사회 갈등과 적대의 복잡한 동학을 너무 쉽게 개인의 실존적 계몽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이다. ‘배운 녀자’라는 성별화된 표현으로 드러나긴 했으되 이건 여성에 국한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진보진영 전체가 직면한 인식론적 궁지다.

미국의 이른바 ‘리버럴’, 민주당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공화당 지지자들은 멍청하고 아이큐가 낮다”는 식으로 조롱하길 좋아한다. 사실 여부는 일단 제쳐두자. 그런 태도는 우리 편에게 우월감을 안겨줄지 몰라도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도움이 되기는커녕 역효과만 낳기 십상이다. 정치공학적인 면을 차치하더라도 평등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강조하면서 공동체 구성원의 차이들을 지적 우열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동안 진보는 진보적 개인의 지적·도덕적 우월성에, 혹은 그런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지나치게 기대어 온 게 사실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무너지며 그 경향은 더 심해졌다. 대의를 가지고 공략하기보다 풍자와 조롱, 패러디를 통해 정치적 적대자를 ‘낙후’시키는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진보가 세련되고 똑똑하고 도덕적인 캐릭터가 된다면 대중이 자연스레 지지해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한동안 그 전략은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경쟁의 장에서 개인의 우월성이라는 요소는 바닷가 모래성만큼이나 위태롭다. 기준 자체가 주관적이기도 하거니와 애당초 보수에 비해 진보는 훨씬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다. 티끌만한 흠결의 폭로만으로도 진보는 금세 위선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똥밭에 뒹굴던 자에게 먹물이 튀어봐야 티도 안 나지만, 흰옷에 튀면 그것만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확실히 불공평한 일이긴 한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박권일 칼럼니스트
본질적인 문제는 범진보 세력의 자기인식이 ‘계몽의 유아론(solipsism)’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나만(우리만) 계몽되었다’는 생각에 여전히 갇혀 있다. ‘탈김치’ 운운이 자기들만의 ‘상식’과 ‘개념’을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폭력이라면, ‘배운 녀자’라는 말은 타자에게 다른 방식의 각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깨어 있는 시민과, 그 깨어 있는 시민 발목이나 잡는 한줌 운동권과, 아직 정신 못 차린 국민들의 영원한 삼항조로 구성된다. 7년이 흘렀다. 우린 아직 여기 머물러 있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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