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람 작가
아름다운 문장, 깊은 사유, 섬세한 관찰력. 당신은 왜 보수적인가? 김훈을 만난다면 묻고 싶었다. 어디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는지. 보수는 나쁘고 진보는 좋은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내 눈에 비친 김훈은 진보 성향 작가의 유형화된 미덕을 갖춘 보수주의자였다. 김훈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내가 찾아낸 첫 단추는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칼이 펜보다 강하다는 말은 없다. 원래 강하니까.” 펜과 칼의 역학 판단에서 시작된 그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모든 작품을 관통한다. 그는 칼을 절대적인 권력으로, 펜을 유약한 지성으로 본다. 칼의 절대성은 불변이므로 펜의 대항은 허망하다. 칼을 노래하는 보수성의 뿌리다. 진보가 탄생한 뒤 패배한다면, 보수는 패배를 수긍한 뒤 탄생한다. “세계는 약육강식이다. 옳고 그름을 넘어 본래 그러하다.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차라리 질서의 꼭대기에 올라서라!”
펜은 그렇게 약할까? 이는 세계를 엄밀하지 않은 은유로 인식하는 과정의 오류다. 사실 세상의 모든 힘과 저항이 다 펜이다. 좌파도 우파도 펜이다. 사회주의도 시장주의도 펜으로 쓰였다. 대통령, 국가기관, 심지어 군대의 수장들도 펜으로 통치하고, 재벌도 펜으로 경제를 지배한다. 당신의 고용주는 칼이 아니라 펜을 다루는 데 더 능숙하여 그 자리에 있고, 칼이 아니라 펜으로 서명하여 당신을 해고할 것이다. 칼은 어디에 있나? 시위대를 진압하던 중 부상당하고, 해외에 파병되었다가 사고로 죽고, 조직 간 영역다툼에 동원됐다가 다른 칼에 찔려 죽는다. 만년 전이라면 그들은 부족장이었다. 이 시대 칼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사각의 링 위에서 찾아야 한다. 무하마드 알리처럼. 알리는 권투 후유증으로 뇌신경 손상을 입어 거동을 제대로 못한다.
칼의 승리는 즉각적이되 일시적이지만, 펜의 승리는 장기적이되 비가역적이다. 나폴레옹 3세와 마르크스는 동시대를 살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황제와 생계를 걱정하던 철학자. 오늘날 황제의 군대와 철학자의 사상 중 무엇이 더 위협적이냐는 질문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견이 없다. 펜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올해 세계는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음 10년간 변화는 희미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잠시 퇴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결국 바뀐다. 정치적인 믿음이 아니라 통계적인 확신이다. 100년 단위로 평가해보라. 정치사회적 구조가 진보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역사는 비탈길을 굴러간다. 이 세계의 관성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창조되었다.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암울한 징후가 아니라 잠시 실현된 나쁜 가능성이다. 이어서 노동당이 해산되고 정의당이 해산되고 새정치민주연합이 해산되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일이 다 일어나도 역사는 언젠가 앞으로 간다. 심지어 탄압의 방식마저 조금씩은 진보한다. 불과 50년 전, 민주주의를 정복한 쿠데타에 동원된 것은 칼이었다. 이제 그런 통치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법의 외피를 써야 한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결코 같지 않다. 50년 전 칼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의문한다. 반면 우리는 지금 법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지만, 50년 뒤에도 그럴까?
이석기와 진보당이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법이 처벌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법이 처벌한다면 어떤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 우리는 믿는다. 과거 칼의 기능이었다. 누군가 총살을 당한다면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었다. 하지만 우리의 후손들은 쉽게 상상할 것이다. 혹시 법이 잘못한 것은 아닐까, 라고. 역사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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