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스러운 명절은 빨리도 돌아온다. 긴 연휴였지만 주변에는 일가친척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람이 꽤 많았다. 고향에 가봤자 웃어른들이 은근히 걱정하는 투로, 그러나 “왜 그러고 사느냐”는 뜻을 담아 잔소리를 하거나 정치적 견해를 우겨서 끝내 불쾌해진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지나 고향 이웃이 왜 그렇게 불편할까? 얼마 전 열린 한국냉전학회 창립 학술대회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인류학자 권헌익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가족’이라는 친밀한 관계가 나라 안팎의 거대한 정치적 흐름과 만난다고 보았다. 한반도 냉전 문화는 가족, 이웃, 마을 공동체의 ‘사회적 관계’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30~40년대 유행했다 50년대에 퇴조한 친족 연구가 한국에서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친족 연구는 결국 정치체제 연구라는 것이다.
이번에 함께 발표된 ‘냉전과 지역사회’ 연구는 새마을운동과 냉전의 관계를 소상히 밝혔다. 허은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1950년대 후반 미국이 안보 차원에서 아시아 농촌 근대화에 개입했다는 점을 드러냈다. 이를 보면, 한국의 농촌 근대화 사업은 자유 진영의 안보 구축 그 이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후반부터 지역 공동체 내부에서 반독재 민주화세력, 납북 귀환자 가족, 하물며 ‘정신병자’의 근황까지 감시·보고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한눈에 모든 죄수가 보이는 벤담의 원형 감옥 같은 감시망 속에서 국가 통치 규율에서 벗어나려는 이들 누구나 ‘비정상인’, 곧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셈이다.
돌아보자. 그 시절 화학비료 사용을 거부한 농부들은 쌀 증산 정책에 반대한다며 ‘빨갱이’로 찍혔고, 술김에 대통령이나 정부를 욕하면 ‘막걸리 보안법’으로 잡혀갔다. 부모, 이웃, 교사는 아이들이 혹여 어른들의 세태 비판을 밖으로 옮길까봐 입단속을 시켰다. 집안의 아들들에게는 “어딜 가든 가운데만 줄을 서라”고 가르쳤고, 딸들에게는 그런 얘기조차 없었다. ‘동네 사람들’ 눈치를 보며 부계혈족을 ‘정상화’하려는 가족의 기획은 각자 삶을 짓눌렀다. 영화 <국제시장>이 아버지의 혈연 중심으로 조명되는 것은 당연하다. 분단 체제와 가부장적 가족 구조, 감시하는 지역 사회는 서로를 지탱했다.
‘밥상머리 민심’이라 일컫는 명절 친족 간 정치 논쟁은 국내외적 이해관계가 얽힌 장기판 위의 승부다. 돈, 종교, 성별, 세대 갈등 또한 똬리 틀듯 후방에서 으르렁거린다. 딱히 할 말 없어 내뱉는 “결혼 안 하냐” “아이 안 낳냐” 등의 말은 ‘비정상인’을 낙인찍었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오래 내면화한 감시 체계,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 보세’를 외치던 정상화 욕구는 이제 다른 삶을 살아가려는 친족과 이웃에 대한 광범위한 배제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명절 연휴에도 어김없이 경계를 서는 군 장병들의 모습과 북한의 대규모 군사훈련 소식이 텔레비전 뉴스를 장식했다. 어떤 부모들은 그 ‘팩트’를 외면하는 후손을 이해할 수 없고, 그와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자식들은 안보 상업주의에 젖은 채널을 고정해놓고 여생을 보내는 부모가 못마땅하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모든 사람이 동시간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정치학자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더 나아가 우리 현실을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으로 분석했다. 가족들은 대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명절은 가족간의 사랑보다 각자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이유진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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