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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우렁각시 노동자 / 이라영

등록 2015-03-04 19:28수정 2015-03-04 20:09

이라영 집필노동자
이라영 집필노동자
술 얘기를 좋아해서 고나무 기자의 책 <인생, 이 맛이다>를 읽다 보니 유시민씨가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단다. “집안일이라는 것이 요리를 빼면 모두 원위치시키는 노동”이라며 다림질을 집안일 중에서 제일 싫어한다고 한다. 정말 집안일은 치워도 치워도 계속 치워야 하며 닦아도 닦아도 내일이면 또 닦아야 한다. 다림질은 ‘대충 원위치’가 아니라 아주 섬세하게 원위치시켜야 하는 노동이니 싫어할 만하다. 원위치시키는 노동을 소홀히 하는 식구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썼으면 제자리!”를 외치던 엄마 생각도 났다.

흔히 ‘레닌 정부의 유일한 여성’으로 소개하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918년 <공산주의와 가족>이라는 글에서 “여성노동자가 천년을 산다 할지라도, 그녀는 매일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가사노동의 반복성을 꼬집었다. 게다가 이 ‘집-사람’은 ‘집 밖’에서 임금노동자 역할까지 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안고 있다. 여성은 여전히 일과 가정의 양립을 주문받지만 남성은 ‘집 안’으로 진출하지 않는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여성들의 가사노동과 양육을 국가가 책임질 것이라는 콜론타이의 희망찬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졌다. 레닌을 비롯하여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에게 콜론타이가 제시한 새로운 가족관계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제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좌파들은 막연한 성평등을 지지해왔지만 구체적 안건으로 들어가면 아주 곤란한 입장을 취하곤 했다. <혁명과 교회의 정의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여성해방이 여성을 ‘창녀’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 프루동은 반여성주의자로 불리기보다 19세기의 걸출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로 남았으며 그의 사상은 한 시절 프랑스 노동운동을 이끌기까지 했다. 프루동처럼 노골적으로 이중성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여전히 많은 좌파들은 성평등 운동을 ‘더 나중에 이뤄져야 할’ 가치로 취급한다.

지난달 말에 국제통화기금(IMF)은 성차별적 법률이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성평등을 말하기 위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권이 성장의 도구가 되어야만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과 여성이 현재 하고 있는 노동은 여전히 경제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대부분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에 의존하고 살면서 ‘가장’이 먹여 살린다고 착각하는 가부장제는 가족 구성원을 남성 어른의 사적 소유로 만든다. 여성의 노동이 사적 영역에 갇혀 있는 한 주부의 노동은 ‘공식적으로는’ 사회적 생산과 무관한 노동이 된다. 이렇게 가정이라는 ‘사적’ 단위를 통해 국가는 여성의 노동을 자연스럽게 착취해왔다. 공/사 구분을 기반으로 성별 분업을 하고 여성의 노동을 사적 영역으로 밀어버린 역사는 결국 전업주부를 ‘노는 여자’로 만든다. 전업주부 어린이집 이용 제한이라는 발상도 전업주부 여성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올리는’ 일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이미 하고 있는 부불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인식시키지 않는다면 여성의 짐은 더욱 늘어날 뿐이다. 우렁각시가 매일 와서 장 보고, 밥을 짓고, 청소하고, 양말과 속옷 세탁까지 해놓지는 않는다. 가정주부의 노동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불필요한 갈등과 어처구니없는 정책만 지속될 것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여성의 날’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여성의 날, 가정의 달, 노동절, 모두 달력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현실은 100년 전 주장을 계속해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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