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잃은 단원고 학부모 유가족의 증언을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었다. 책을 읽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처럼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가족을 잃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유가족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을까?
마땅히 살아 돌아와야 했을 수백명의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사건의 원인이 안전과 구조에 대한 책무를 방기한 이들에게 있을 때, 유가족이 느끼는 고통을, 진실을 요구하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편견에 가득 찬 집단적 증오로 공격당할 때의 원통함을 당사자가 아니라면 어찌 실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도 하게 됐다. 책을 읽는 나는 왜 눈물을 흘리는가? 왜 고통에 사로잡히는가? 그럼에도 나는 왜 책을 덮지 못하는가? 왜 덮었다 다시 펼치는가? 공감이란 무엇일까? 공감이란 약자를 연민하는 본능일 수 있고 타인에게 일어난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상상력일 수 있다. 혹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윤리적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것은 그런 종류의 감정 이상이었다. 유가족의 말들에 귀를 기울일수록, 그 말들은 나를 포위하고 침투했다. 유가족의 말들은 세련되거나 이성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했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트라우마 이후의 삶, 아이들과 나눴던 순간들을 헛헛한 웃음과 뒤늦은 후회로 되새겨보는 반복 강박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유가족들의 말 속에서 하나의 절대 의지가, 이제 죽은 아이들을 위한 진실을 찾는 데 자신들의 삶을 바치겠다는 의지가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아이들과 맺은 약속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창현 학생의 엄마 최순화씨는 말했다. “창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엄마, 엄마가 하는 일이 맞아요. 엄마가 진상규명을 위해서 그렇게 애쓰는 게 맞아요. 그러니까 엄마 더 열심히 해줘.”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에서 말했다. “삶은 어리석은 자에 의해 씌어진,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의미 없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유가족들이야말로 지금 이 세상에서 셰익스피어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 때문에 분노의 절규 소리를 내지르면서 삶을 의미 없게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아이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발만 내디디면 무의미로 추락할 벼랑을 바로 옆에 두고 그들은 아이들과의 약속을 상기하며, 최대한의 의지를 발휘하며,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씨는 말했다. “우리가 지금 만들려고 하는 안전법과 그걸 위해 하는 우리들의 모든 행동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유가족들의 말은 혼란 속에서 어떻게든 사람들과 함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적, 경제적 셈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유의 결과 겹을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마치 안산에서 팽목항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있는 듯했다. 마치 유가족들이 겪는 트라우마 후의 미망에 빠져드는 동시에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진실을 위한 싸움에 연루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끌려가듯 유가족을 쫓아갔다. 그렇게 수동적인 상태 속에서 나는 가슴이 뛰고 아프고 무너졌다.
책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잊지 않겠다”는 말을 했던 것인가? 유가족들은 과거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데 왜 나는 자유롭고도 능동적인 선택인 양 그렇게 말해 왔는가? 그렇다면 이제 “잊지 않겠다”고 감히 말할 때 나는 누구와 함께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나는 팽목항으로 향하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기나긴 행렬을 보면서 이 질문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심보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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