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람 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이스탄불의 멜랑콜리 정서를 탐색하여 문명 간 교차와 충돌에 관한 상징들을 발견한 작가”라는 평가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빛바랜 기억으로 간직한 채 서구 제국주의에 압도당해 스러져가는 모국의 문명을 향해 왔다. 몰락한 조국을 다루는 파무크의 문학이 ‘한’(恨)이 아닌 ‘멜랑콜리’를 자아내는 이유는 깊은 사색으로부터 민족의 물리적 패배를 넘어선 아이러니를 포착하기 때문이다. 파무크는 이슬람계 터키 민족주의자들이 사로잡힌 옛 영화에 대한 정교한 기록의 상당수가 서양인들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 터키의 이슬람 문명 역시 서양의 비잔틴 문명을 밀어내고 이스탄불에 도착한 ‘새로운 세대의 점유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 모든 사실을 입체적으로 인식하는 자신의 합리성이 서양식 교육 덕택에 해방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여전히 스스로 터키인을 초월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마저 잘 알고 있었다.
자서전인 <이스탄불>에서 파무크는 아내가 미국 유학 시절 콘스탄티노플 ‘몰락’이 아닌 ‘정복’이란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터키 민족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았다고 썼다. 서양인들이 이슬람에 함락된 이스탄불을 수복하려던 십자군 운동을 서슴없이 ‘원정’(expedition)으로 부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다지 공정한 관점은 아니다. 그런데 파무크는 놀랄 만큼 차분한 태도로 터키 사회의 피지배 계층인 비무슬림 소수민족들 역시 폭력과 약탈에 시달리는 인질 신세였다고 기록한다. 민족주의 성향의 정부가 들어선 뒤 터키를 떠난 비무슬림 소수민족의 수는 비잔틴 제국이 함락된 500년 전 터키를 떠난 비잔틴 국민의 수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터키 정부는 이스탄불 ‘정복’ 500주년 행사에 대통령과 총리가 참석을 포기할 만큼 서양 열강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반면 미국 정부는 신대륙 ‘발견’ 500주년 행사를 스페인과 연계하여 거리낌없이 성대하게 벌였다. 파무크의 멜랑콜리는 민족적 비애라기보다는 외롭게 배회하는 지성의 정서에 가깝다. 그는 몰락해가는 조국에서 민족과 제국이라는 이항 대립 구도보다 더 복잡한 아이러니를 보았던 것이다. 제국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세계를 이항 대립 이론에 간편하게 두들겨 맞춰 넣는 사람들은 아이러니를 인식하기는커녕 거꾸로 아이러니 속에 놓인다. 예를 들어, 주한 미국대사를 기습한 김기종은 누구인가? <시엔엔>(CNN)이 그를 우파로 소개하는 내내 국내 보수 언론들은 그에게 좌파 딱지를 붙였다. 그를 분류하는 이름은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김기종의 괴물과도 같은 이중 정체성은 이 사회가 행한 이중 배제의 쌍생아다. 보수는 근래 들어 ‘종북’을 좌파의 접두어로 붙여두려 하지만 정작 좌파는 ‘종북’ 논리로 민족해방 계열을 우파로 밀어놓는 분리주의 전략을 취해 왔기 때문이다. 김기종은 좌파에겐 우파이고 우파에겐 좌파이며 스스로는 좌파가 아닌 동시에 우파도 아닌 셈이다. 민족주의의 계보학이 어디서부터 엉키기 시작했는지를 파악하려면 ‘좌파적’ 공산주의와 ‘우파적’ 민족주의가 결합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쩌면 이 땅 위에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의 계보가 쓰여 왔는지도 모른다.
미 제국주의에 맞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국가(Islamic State)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제국 노선을 지향하는 대목이 이 아이러니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제국주의는 민족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그 무엇의 반대말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의 반대말로 정의되어야 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 가장 근접한 개념이 뭔가? 슬픈 아이러니이지만, 바로 민족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가 아닐까?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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