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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당구 치러 갑시다 / 임범

등록 2015-03-23 18:54

한국 남자들에게만 통하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우스개가 있다. 문)세계에서 눈이 가장 많이 오는 곳은? 답)군대. 문)남한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은? 답)당구장에서 배달시켜 먹는 자장면. … 당구 치면서 자장면 먹는 건, 군대에 가서 눈 치우는 일만큼이나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였을 거다.

그 당구장 문화가 변하고 있단다. 아니, 변하기 시작한 지도 제법 오래된 모양이다. 단골 당구장 주인에게 들으니 젊은이들이 예전처럼 당구를 치지 않는데다, 미성년자의 당구장 출입이 허용된 지 수년이 지났는데 미성년자는 여전히 잘 안 온단다. 그래서 당구장 매물이 늘고 있단다. 대신 3쿠션 국제시합용 대대(큰 당구대)는 수요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국제시합 규격과 룰에 맞춰 3쿠션을 치는 어른들이 는다는 말이다. 3쿠션 하면 조그만 당구대에서 돈내기로만 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스포츠 당구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말일 거다.

최근 당구계에 큰일이 많이 일어났다. 최성원 선수가 한국 최초로 3쿠션 세계 랭킹 1위에 올라섰고, 그보다 조금 앞서 세계 랭킹 2위까지 올랐던 김경률 선수가 35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부산 출신인 둘은 여느 한국 남자들처럼 통과의례로 당구를 시작했다. 왕립당구학교 같은 데서 전문적으로 당구를 배운 고수들이 수두룩한 세계무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가 개별 대회에서 1, 2등을 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한명이 세계 랭킹 1위를 하니까 한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삼년 전에 당구와 관련된 스토리를 개발한다고 당구인 몇명을 만난 적이 있다. 원로 당구인일수록 당구가 나쁘게 비칠까 두려워했다. 도박, 조폭 같은 이미지들과 연결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긴, 당구가 파친코와 같은 유기장업으로 분류돼 보건사회부 관할로 있었던 게 1989년까지의 일이다. 80년대 중후반 이따금 당구 경기가 텔레비전에 방송될 때도 기업들은 자기 회사 이름이나 제품이 등장하는 걸 꺼렸다고 한다.

그때 김경률 선수도 만났는데, 그는 달랐다. “좀 과장해도 돼요. 이야기가 재밌어야지. 나쁜 놈도 나오고.” 논픽션과 픽션을 분리해서 보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인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에겐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한국 당구가 이제 세계 정상에 올랐고, 곧 최정상에 오를 거라는. 실제로 지금 그렇게 됐다. 1년에 3쿠션 세계 대회 10개를 치르는데, 세계 랭킹 12위 안에 들면 항공권, 숙박권 등이 제공되는 시드를 받는다. 언젠가부터 그 12명 가운데 3~4명의 한국 선수가 들어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당구 여건이 그리 좋은 것 같진 않다. 지상파 텔레비전은 여전히 당구를 취급하지 않고, 케이블 방송도 국내에서 치러진 경기들만 재방, 삼방 한다. 아울러 여전히 스폰서로 나서려는 기업들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3쿠션 세계대회 1등 상금이 600만원이다. 스폰서 없으면 당구 선수로 먹고살기가 쉽지 않다. 김경률 선수가 죽기 전 상금 1억원짜리 국내 대회를 만들려고 뛰어다녔다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밤에 잠이 안 올 때 케이블 방송의 당구 경기를 보면, 굴러가는 공에 몰입돼 잡념이 사라지는 동시에 혈압 오를 일이 없어 잠도 잘 온다. 당구 칠 때는 잘 안 맞으면 화도 나지만, 고수들의 경기를 보다 보면 이게 참 ‘신사의 스포츠’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 수년 전 집 근처 당구장에 대대가 들어와 그때부터 당구 치러 자주 간다. 당구는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아니 나이 들수록 더 잘 치는 드문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십여년 동안 ‘4대 천왕’으로 불려온 세계 정상의 네 선수 가운데 둘이 50살을 넘었다. 당구 치러 갑시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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