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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서울과 파주의 이중생활 / 한귀영

등록 2015-03-29 18:37

봄기운 완연했던 지난 토요일, 안산에 뜻깊은 생일상이 차려졌다. 주현이의 생일을 기억하기 위해 가족과 친척, 친구, 유가족 등 50여명이 세월호 치유공간 이웃에 모였다. 이날의 생일상은 ‘그날’ 이전까지는 이들과 일면식도 없던 파주 주민들이 손수 차렸다. 너무 일찍 별이 된 아이들을 위한 16번째 생일상이다. 그동안은 전국 단위 시민모임인 리멤버 0416이 상을 차려왔지만, 이날은 파주 주민들이 나섰다.

그날 이후 벌써 1년이 다가오고 있다. 잊지 말자고, 뭐라도 하자며 비장한 각오와 다짐들이 난무했지만, 세월호는 잊혀가고 진실은 여전히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 그토록 어렵게 구성한 세월호 특위는 활동을 방해하려는 노골적 시도들에 부딪히고 있다.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야 한다고 말했었다. 무엇보다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비루하다. 비관과 체념이 확산되고 있다. <한겨레> 신년조사에서 국민들의 60.5%가 우리 사회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응답했다. 전문가들은 무려 90%가 비관적으로 평가했다.

정말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1년 사이 박근혜 대통령 지지도는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는데, 성찰과 경청의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경남도지사는 무상급식을 볼모로 증오와 막말의 정치를 도발하고 있다. 위로와 대안을 주어야 할 야당은 여전히 못 미덥다.

피곤과 비관을 안고 서울에서 동네로 돌아오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그날 이후 동네 공원에 추모단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던 세파모, 즉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파주 주민 모임은 서서히 성장해오고 있다. 문화제, 도보행진, 유가족과의 북콘서트 등 세월호의 기억을 공공화하기 위해 활동해왔다. 작년 가을부터는 세월호 이후를 준비하며 주민공동체 논의도 하고 있다.

지방재정의 구조와 문제점에 대해 공부하는 공부모임에는 30여명의 주민이 참여하고 있다. 지방정치의 주인이 되려면 정책 집행의 수단과 근거인 조례와 재정을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최근 파주시가 학교급식을 개악하는 새로운 조례를 입법예고하자, 지방재정모임은 이 조례의 문제점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자료를 만들어 각 언론과 시민단체들에 제공했다. 파주급식네트워크라는 더 큰 연대를 이뤄낸 주민들은 4000여명의 서명이 담긴 서명부를 제출하고 들러리 공청회 시도를 저지해, 시민들의 참여가 이루어진 공청회를 만들어냈다. 주민들은 저항과 비판을 넘어 동네합창단 꾸리기, 공유경제 같은 즐겁고 발랄한 대안들을 꿈꾸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서울과 파주에서 이중생활을 한다. 접경지역 파주는 서울보다 훨씬 보수적인 곳이다. 문화적 자원도 비교할 수 없이 부족하다. 진보적인 서울에서 ‘보는’ 전국정치는 비관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보수적인 파주에서 ‘겪는’ 동네정치에서는 희망이 싹튼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 걸까? 보는 것과 겪는 것 사이의 차이일 것이다. 무언가를 겪다 보면 무언가 사람이 바뀐다. 세파모 사람들은 함께 겪음으로써 바뀌기 시작했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돌아오는 일요일, 파주시민과 고양시민의 연대 보도행진이 파주에서 일산까지 열릴 예정이다. 파주의 50여개 작은도서관들은 한데 힘을 모아 유가족 간담회를 준비 중이다. 4월 이후 매주 금요일 밤이면, 추운 겨울을 이겨낸 파주의 나무들에 ‘금요일엔 돌아오기를 염원하는’ 노란 리본들이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주현이의 생일상은 매운맛을 좋아하는 아이를 생각해서 유독 매웠다. 함께 겪을 계기들을 만들자. 맵게 마음먹어야 한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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