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을로 바뀔 무렵 불어오는 바람 냄새,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준 시래기 된장국 냄새, 아버지의 품에서 나던 희미한 파이프 담배의 향, 연인의 살결이 풍기는 달콤한 내음…. 나의 내밀한 냄새 목록에 영원히 각인된 것들의 일부다. 물론 저건 ‘좋은 냄새들’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끔찍하게 싫어하는 냄새들의 목록도 존재한다. 아무튼 목록에 오른 것과 같은 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특정한 감정상황 속으로 빠져든다. 논리와 분석 따위는 무용하다. 느끼는 것과 거의 동시에 판단이 끝나버린다. 다만 행복해지거나 불쾌해질 따름이다.
시각과 청각은 역사 이후의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인정받아 왔다. 보고 듣는 건 텍스트와 이미지를 창조하는 바탕이다. 그야말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능력이라 할 만했다. 반면 후각은 종종 ‘더 동물적인’ 감각이라 여겨졌다. 이성적 추론을 통하지 않았지만 ‘감’이 뭔가 이상할 때 우리는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별나게 그런 ‘촉’이 발달한 사람에게 ‘개코’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확실히, 냄새는 감정을 환기하는 기능에선 다른 감각을 압도한다. 후각은 호불호를 선명하게 나눌 뿐 아니라 때로 역전시켜버리기도 한다. 음식의 예를 들자면, 극단적 홍어 혐오자였다가 ‘홍어의 포로’가 된 사람을 나는 제법 많이 안다. 요컨대 후각은 매혹과 혐오의 양극을 오가는 감각이다.
혐오표현이나 인종차별 발언에 유독 냄새와 관련된 것이 많다. 한국인을 향한 차별발언 중 가장 흔한 것은 “김치 냄새” “마늘 냄새”다. 어느 재일조선인은 어린 시절 일본인들이 자기한테서 마늘냄새 난다고 할까 봐 매일 피가 날 때까지 이를 닦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냄새라는 표징은 그토록 집요하고 끈덕지다. 한국인들은 자기들끼리도 냄새를 가지고 적나라한 혐오를 드러낸다. 전라도 사람에게 “홍어 냄새”가 난다고 조롱하고, 개룡남(‘개천에서 용 난’ 경우에 속하는 남성)에게서 “개천 냄새”가 난다고 이죽댄다. 자신을 뺀 모든 한국인의 ‘미개함’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을 때는 “김치 냄새 난다”고 비난한다. 냄새는 이처럼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 소속된 자와 배제된 자를 가르는 즉각적인 낙인이다. 동시에 그 낙인을 사용하는 이가 반민주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임을 드러내는 정확한 신호다.
오늘날 후각적 표현으로 분출되는 사회적 혐오발언들은 계몽 이전의 야생성이 아니다. 계몽의 폭력성을 거부하는 탈근대주의적 저항도 아니다. 그저 동물화한 반지성주의다. 선비들처럼 위선 떨지 말자는 것. 그래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단 걸 알면서도 그들은 ‘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혐오발언을 지속한다. 일베가 이 분야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정치적으로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비슷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간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을 향해 쏟아진 인종주의적 비난과 인신공격 중 상당수는 진보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 폭력을 추동하는 감정이 분노와 슬픔에서 증오, 혐오, 경멸 같은 감정으로 많이 옮겨간 것 같다. 군대폭력의 수치 자체는 과거에 비해 여실히 줄어들었음에도 한 사람만을 따돌리고 배제하는 형태의 가혹행위는 오히려 심해지는 추세다. 후각사회는 실제로 후각이 지배하는 사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일종의 상징이자 은유다. 후각사회란, 혐오와 열광이 설득과 토론을 대신한 사회다. 또한 맹렬하게 끓어오르다가도, 냄새에 코가 마비되듯 쉽게 잊어버리는 사회다. 무엇보다 그 사회는 실제 나지도 않는 냄새를 상상적으로 재현하며 확대재생산하는 사회다. 이런 감각의 변화들, 두렵고 불안해진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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