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의 한 기자가 2012년 “카라바조는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상이었다”고 발언하여 이탈리아의 성소수자들을 격분하게 만든 적이 있다. 카라바조가 동성애자가 아닌 이유로는 그가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한 남자를 살해했던 사실을 꼽았다. 남자 누드를 많이 그려서 동성애자라는 ‘의혹’이 있었던, 17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 화가인 카라바조는 오늘날 양성애자로 알려졌다. 그가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분노의 초점은 바로 ‘정상’과 동성애자의 분리에 있다. 아울러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거장의 명예를 더 훼손한다고 여기는 모습이다. 어떻게 해서든 거장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 동성애자는 ‘정상’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정상 범주에 속하기 위해 무수한 ‘나’들을 깎으며 산다. 개개인의 몸과 삶, 취향 등은 우리의 보편성이나 평균이라는 개념에 늘 밀린다. 좋은 성격을 표현하는 말은 ‘둥글둥글한 성격’. 정상이 강조되는 사회일수록 ‘각’(角)을 참지 못한다. 남 하는 대로, 남들처럼, 정 맞을 모난 돌로 보이지 않으려면 스스로 굴려서 둥글게 다듬어야 한다. ‘그래 가지고 사회생활 하겠어’라는 힐난은 대부분 둥글게 되지 않으려는 개인의 자아존중감을 공격하는 말이다. 정상성에 대한 규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에, 무엇을 정상으로 규정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로 그 사회 권력의 얼굴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개그’라는 이름의 미디어 폭력은 숱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외국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불편함투성이다. 드라마 속의 가부장, 외화 번역의 성차별은 공기처럼 일상적인 현상이다. 부부 사이에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남편은 근엄하게 반말을 하는 정도는 예삿일이고, 남편에게 폭행당한 뒤 아무렇지도 않게 멍든 얼굴을 계란으로 문지르기도 한다. 이런 장면을 금지하자는 뜻이 아니다. 금지가 많은 사회는 옳지 않다. 멍든 얼굴을 감추려 애쓰는 여자의 수치심을 더욱 강조할 뿐 이를 ‘폭력’으로 보지 않는 그 시각이 문제다. 드라마 속에서 성폭행 피해 여성이 임신을 알게 된 뒤 가해 남성에게 매달리는 복장 터지는 진행도 본 적 있다. 이 모든 현상은 특별히 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 정상적인 삶의 기준은 아주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삶을 괴롭히는 고문 같은 인식 체계다. 방송에서 동성 간의 키스 장면이 불편한 그들은 누구인가. 자유와 욕망의 범위는 주로 특정 계층과 성별에게 한정되어 있다. 노인,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은 자유와 욕망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제도화된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문화나 전통, 국민 정서 등으로 둔갑하여 우리와 한 몸이 되어 있다. 너무 일상적이라 문제제기 하기도 눈치가 보이며 매사에 ‘피곤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눈초리가 두려워 이 불편함을 불편하다고 잘 표현하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피해의식’이라는 모욕적인 공격까지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전혀 ‘쿨’하지도 않으면서 ‘쿨’한 척 넘어갈 때도 많다. 이것이 우리 몸에 그대로 박혀 있는 차별의 실체다. 누군가의 문제제기는 불평, 불만, 투정 혹은 피해의식이 되지만 누군가는 제도적으로 당당하게 심의를 거쳐 금지와 삭제라는 억압을 행할 수 있다.
‘가족드라마’ 중에는 ‘가부장 드라마’인 경우가 많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하기에는 그 ‘재미’의 기준이 지극히 편협하다. 어떤 폭력은 정상의 범주 속에서 재미있게 펼쳐지고, 어떤 연애는 비정상으로 밀려나 심의를 받는 현실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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