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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네메시스의 복수 / 김병익

등록 2015-04-02 18:23

무서워라, 역사는 결코 희생 없이 진행되지 않고 발전은 대가를 조금도 사양하지 않으며 자연은 자신의 훼손에 대한 보복을 정녕 마다하지 않는다. 세계와 그 운명은, 네메시스의 눈길을 아무래도 쉽게 피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이강환의 <우주의 끝을 찾아서>를 구해 읽은 것은 순전히 소년 같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우주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 크기는 얼마고 그 모습은 어떤지, 아이들이 품었음 직한 궁금증이 허연 머릿발 속에서 일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기초 물리학에조차 아무 소양 없이 천문학을 읽는 일은 소가 경을 듣는 것처럼 무작스런 일이었다. 그럼에도 저자의 흥미로운 이야기 솜씨 때문에 끝장까지 넘긴 이 책에서 나는 귀중한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어떤 거대한 발견이나 발명도, 앞서 나온 갖가지 자잘한 발견 발명들이 모이고 쌓여 ‘어느 날 문득’ 위대한 업적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도 그런 선행 작업들로 가능한 천재들이었다. 둘째는 태양계 너머로 우주여행에 나설 만큼의 엄청난 진보에도 불구하고, 빅뱅 이전의 시간과 우주 밖의 공간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50억년 전의 세상은 어땠을까, 빅뱅은 어쩌다 일어났을까 하는 질문도, 우주에는 2000억개의 별을 가진 은하계가 2000억개에 이른다는 차라리 허망한 추산에도 불구하고 그 바깥의 공간은 어떤 것인지 그 이전은 어땠는지 물어볼 수 없는 것이다. 빅뱅 이전과 우주 외부에 대해서는, 그것이 신일까 허무일까 묻기는커녕, 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금기의 지역이다.

이 두 가지 배움은 짐작되기도 하고 그럴 만하겠다 싶기도 했지만, 이 책에서 뜻밖에 내 심중을 쿵 울리며 꽂혀 들어온 것은 ‘네메시스의 복수’란 말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어두운 내게 저자가 설명해준 네메시스는 원래 분배의 신이어서 공동체 사회에서 생산물을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하던 선한 여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을 부려 불평등하게 나누게 되자 네메시스의 직분이 달라져 일한 만큼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소개하는 대목은 6000만년 전 세상을 지배하던 공룡들이 몸통과 거동이 너무 거대해진 참에 지구로 쏟아져 내린 숱한 혜성들의 충돌로 멸망했다는 설명 중에 나온다. 공룡의 멸종을 이야기하며 동원된 ‘네메시스의 복수’란 말은 내 안에서 단박에 오늘날의 갖가지 숱한 세기적 문제들을 들쑤시며 번졌다. ‘복수’란 말의 그 살벌함 때문에 먼저 연상된 것이 9·11사태로부터 근래의 이슬람국가(IS)에 이르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였다. ‘진보의 시대’ 21세기 초두부터의 그들의 ‘묻지 마’ 공격과 인간 살육은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경제-정치적으로, 군사-문화적으로 착취해온 제국주의의 거대 열강에 대한 ‘네메시스적 복수’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선진 경제에 대한 빈 라덴의 반문명적, 수니파 원리주의에 의한 반인간적 폭행일 뿐이다. 새뮤얼 헌팅턴 같은 서구 지식인들에게 그 테러는 <문명의 충돌>의 가장 포악한 예가 되겠지만, 정의를 향한 여신의 피할 수 없는 보복으로 오해될 현대문명 속의 반달리즘일 것이다.

그러나 남북 세계의 충돌이란 문제는 당연히 후진 지역과 선진 지역, 빈곤층과 부유층 간의 뜨거운 대척을 연상시킨다. 지난 1월의 다보스 회의에 다급한 의제로 제기된 것이 부의 불평등 문제였는데, 몇해 전 ‘1%를 향한 99%의 항의’가 월가에서 벌어졌지만 이 회의에서는 “조만간 상위 1% 부자의 재산이 나머지 99%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아질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노동의 임금으로는 결코 자본의 증식을 이겨낼 수 없다는, 그래서 빈자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게으른 부자들 앞에 저절로 쌓이는 부를 따라갈 수 없다는 사태를 경고하는데, 실제로 지난 20년 동안 두어 차례의 세계적 금융 공황이 일어났지만 그럴수록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실업자 수는 더 크게 늘어났다. 이 심각한 양극화가 지금은 ‘삼포 세대’의 자폐적 탄식으로 숨어 있지만 분노한 젊은 세대가 앞으로 어떤 형태의 네메시스적 보복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두려운 네메시스의 시선에 더 크게 떠오르는 것이 인구 폭발 문제다. 현재의 세계 인구는 72억으로, 가변성이 높아 자신있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2050년대에는 90억으로 안정될 것이란 기대와 2100년대에는 120억을 넘을 것이란 불안이 있다. 소득이 커질수록,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출산율이 줄어든다는 추세가 보이지만 지구의 크기와 자원 용량으로 지속가능한 인구를 적게는 10억, 많게는 30억으로 추산하는데, 현재의 인구만으로도 지구의 본전을 엄청 크게 파먹어 들고 있는 중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여 1810년대의 10억에 이르기까지 20만년이 걸리도록 완만했던 인구 증가는 산업혁명 이후 2세기 동안 가파르게 상승하여 이제는 70억을 넘고도 매년 독일 인구만큼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도 경제성장과 노령 인구를 위해 산아 증가를 독려하고 있지만, 앨런 와이즈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구 쇼크>에서 신맬서스적 비관주의를 환기시키며 식량과 물의 부족, 생태계 훼손, 토지 산성화, 지구 온난화 등 갖가지 지구적 문제를 지적한다. <회의적 환경주의자>인 롬보르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처럼 성장지상주의의 재촉으로 자연 파괴가 가속되면 한 세기 후 세계지도와 우리 삶의 방식과 내용은 크게 변하고 인류는 너무 큰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해 네메시스의 보복을 당한 공룡의 뒤를 밟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많이 깨우쳐준 미국의 리프킨은 인간이 잡아먹기 위해 기르는 소가 12억마리를 넘어 사람들의 허기를 채울 곡물 60%를 먹어치우며 땅, 물, 공기에 심각한 환경 생태 변화를 야기한다며 <육식의 종말>을 강력 권하고 있는데, 문학으로 가르침을 주어온 비평가 염무웅은 근래의 내게 또 핵(발전)의 위험을 전해주었다. 독서록 <반걸음을 위한 현존의 요구>에서 장욱식의 <핵의 세계사>를 세심하게 요약하면서 “핵발전과 핵무기는 기술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한 뿌리에서 나오는 가장 공포스런 프로젝트”라고 무겁게 지적한다. ‘핵 없는 세상’을 제창하는 그는 핵 공포감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뚜렷한 현장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꼽는다. 그것은 정말 에너지의 방만한 낭비가 초래한 가장 ‘뜨거운 악’으로서 네메시스의 복수 목록 맨 앞을 차지할 만하다. 태평양전쟁 때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 다음의 둘째로 많은 인명손실을 당한 우리나라는 오늘날 핵발전 비중이 크고 그 시설이 노후해 확률적으로 그 위험성이 어느 나라보다 높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나는 36년 전 문득 일어난 대통령 시해 사건을 보던 날 밤, 기특하게도 앞날의 두 가지를 예상했다. 유신권력이 이끈 경제 성장과 근대화가 민주주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리라는 긍정적 평가, 그럼에도 그러기 위해 자행한 숱한 탄압과 불법들로 우리 내면에 깊이 박힌 심리적 상처들을 치유하는 데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우려가 그것이었다. 그 비관적 예상은 더욱 심해진 빈부 격차와 무력한 자의 억눌린 항의, 법과 공정성에 대한 불신과 불통, 사람들의 표독한 증오심과 할큄 등등 오늘의 우리 삶 곳곳에서 압축성장의 민낯으로 드러나고 있는 악덕들이 그 네메시스의 목록에 들 것이 아닌지 두렵다. 무서워라, 역사는 결코 희생 없이 진행되지 않고 발전은 대가를 조금도 사양하지 않으며 자연은 자신의 훼손에 대한 보복을 정녕 마다하지 않는다. 세계와 그 운명은, 네메시스의 눈길을 아무래도 쉽게 피하지 못할 것 같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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