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노동은 개인적·집단적 삶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 산업노동자들의 절망과 고뇌, 육체적 고통을 이해하고, 많건 적건 이를 나누어 가짐이 없이 그동안에 축적된 물질적 경제적 부의 일정부분을, 또 그것을 가능케 한 지배적 사회관계 내에서 기득권을 향유할 때 누가 과연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사회가 도덕성을 갖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최장집,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1988)
산업화시대에 우리가 노동문제를 “개인적·집단적 절망과 고뇌”로 목도했다면, 똑같은 절망의 얼굴, 고뇌의 무게로 지금 ‘청년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사무실에서도 밥집에서도, 올해 들어 짧고 길게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전직 기획재정부 장관, 대기업 부사장, 은행장, 민간경제연구소장, 어느 사모펀드 대표까지 대화 중에 묻지 않아도 ‘청년’을 말했다. 분별없는 젊음에 대한 기성세대의 충고도, 흘러간 옛노래 같은 패기와 격정의 청년예찬도 아니다. 돈·주택뿐 아니라 일자리가 하나의 ‘자산’이 된 시대, 암울한 일자리에 “쓰러져가는”(사모펀드 대표) 청년 얘기다. 봄꽃 아래에서도 다들 우울한 어조로 청년을 걱정할 정도다. 바야흐로 가히 청년시대다.
생산(경제성장)·내수의 침체, 대기업 갑질, 재벌기업 경영승계, 정치세계의 대립·갈등까지도 “삶의 중심 이슈”라고 제각각 유효성을 주장하기를 그치고, ‘청년’ 앞에 무력하게 휩쓸려가는 형국이라면 과장일까? 그런 점에서 ‘청년시대’는 역설적으로 청년이 기이하게 물구나무선 우리 시대의 사회경제적 표현이다.
지난 2월 청년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 최악(11.1%)을 기록했다. 퍼센트(%)는 차갑고 무표정하다. 그 뒤편의 그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한숨과 탄식의 풍경을 좀더 감성적이고 풍부하게 시야에 포착하려면 머릿수를 들여다봐야 한다. 청년(15~29살)은 총 948만8천명으로, 취업자 389만9천명, 실업자 48만4천명이다. 비극적이게도 열두달 중에 졸업시즌 2월에 실업자가 가장 많이 ‘배출’된다. 2월 실업자는 2013년 37만1천명, 지난해 47만3천명이다. 물론 청년 일자리가 계절이나 경기순환 요인 탓만이 아니라는 건 지난 몇 년의 경험에서 명확해졌다.
미국 노동경제학 교과서의 실업문제를 다루는 장엔 흑인과 이주노동자 등 인종적 접근이 곧잘 등장한다. 한국 독자로선 낯설다. 하지만 이제 우리 교과서에도 “차별받는 어두운 노동력”으로 청년을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사회적 대타협을 시도하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는 경제주체들이, “기업들이 아직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잠재노동력(청년)에 노동유연성의 고통을 전가하는” 기존 노동시장 ‘구조’를 과연 정치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조직노동자들의 굴뚝·철탑농성에 대한 사회적 냉담과 무관심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배경엔 시장에서 배제되고 있는 청년에 공감하는 정서도 조용히 한몫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만연한 청년실업엔 정치와 경제를 담당하는 집단·세력의 어떠한 진영논리도 표면적으로는 개입돼 있지 않다. 진영을 불문하고 정치·경제·사회 각 영역이 자기 일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열패감 속에 도서관 한구석에 앉아 있는 청년들은 이런 ‘기성’ 조직에 준열한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전통적인 ‘생산’보다는 자긍심을 갖고 일할 청년 일자리 ‘배분’이 더 호소력 있는 과제로 등장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경제학자 케인스의 말과는 거꾸로 위험한 것은 사상이 아니라 기득권이다. ‘물가당국’ 한국은행도, 경제성장 문제에 집착해온 직업 경제학자 논객도 학설을 넘어 차분하게 ‘고용의 도덕성’에 침잠해야 할 때다.
조계완 경제부 산업2팀장 kyewan@hani.co.kr
조계완 경제부 산업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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