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명복을 빌지 마라 / 후지이 다케시

등록 2015-04-12 18:58수정 2015-04-12 18:58

4월 초에 처음으로 단원고를 찾아갔다. 1년이 지나서야 찾아간 안산 고잔동의 봄날은 1년 전에도 그랬을 것처럼 조용하고 따스했다. 꽃들과 메시지들만 가득한 2학년 교실을 둘러보고 유가족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동하다가 천변에 걸린 노란 현수막에 적힌 한 글귀가 감상에 빠졌던 나의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함께 죽였고 함께 구하지 않았으므로 외면하고 망각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작년 4월16일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하던 ‘잊지 않겠다’는 맹세는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겐 그들을 망각할 권리 자체가 없다. 그들을 죽이고 그들을 구하지 않은 이 사회는 지금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러가고, 우리는 이 사회가 유지되도록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살인자의 대오 속에 있다.

‘가해자’라는 위치에 대해 고민할 때 항상 생각나는 글이 있다. 1939년에 징병되어 만주에서 근무하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8년을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보낸 이시하라 요시로(石原吉郞)라는 시인의 글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함께 있는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했던 수용소 경험에 관해 쓴 ‘비관주의자의 용기’라는 글에서 그는 먼저 ‘가해’와 ‘피해’라는 구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가해와 피해가 맞서는 자리에서는 피해자는 ‘집단으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피해에 있어 끝내 자립하지 않는 자들의 연대. 연대를 통해 피해를 평균화하려는 충동. 피해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가해적 발상. 집단이기에 피해자는 잠재적으로 공격적이며 가해적일 것이다.” 그런 한편 ‘가해자’에 대해서는 “사람이 가해의 자리에 설 때, 그는 항상 소외와 고독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마치 ‘피해자’를 폄하하고 ‘가해자’를 평가하는 듯하지만,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한 가해자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탈락한다. 그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비인간적인 대치 속에서 비로소 한 인간이 생겨난다.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 생겨난다. 피해자 속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 승인하는 장소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하나의 위기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장소이다.” 수용소의 극한 상황을 살아낸 이 시인은, “가해와 피해의 유동 속에서 확고한 가해자를 자신에게 발견해 충격을 받고 오직 혼자서 집단을 떠나가는 그 ‘뒷모습’”에서 ‘인간’을 본다.

세월호 유가족, 특히 부모의 이야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이 ‘가해자로서의 승인’이다. 유가족들이 계속 싸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피해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해자로 만든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해자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제 지겹다’고 투덜대는 이들이다. 자신의 위치를 깨닫지 않기 위해 집단 속으로 몸을 숨기며 잊히기만을 기다린다. 4월16일이 되면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희생자의 명복을 빌겠지만, 이 명복을 빈다는 행위는 희생자들을 저승으로 내보내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떨쳐버리려는 몸짓이 아닌가?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이 일본에서 5·18을 목도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명복을 빌지 말라’도 그런 시 가운데 하나다. 마지막 구절만 인용한다. “억울한 죽음은 / 떠돌아야 두려움이 된다. / 움푹 팬 눈구멍에 깃든 원한 / 원귀가 되어 나라를 넘쳐라. / 기억되는 기억이 있는 한 / 아아 기억이 있는 한 / 뒤집을 수 없는 반증은 깊은 기억 속의 것. / 감을 눈이 없는 죽은 자의 죽음이다. / 매장하지 마라 사람들아, / 명복을 빌지 마라.”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