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가 걷는 길을 ‘버진 로드’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몇달 전에야 알게 되었다. 버진 로드? ‘순결의 길’이라는 뜻인데 순결한(?) 신랑, 신부의 새 출발을 의미한다고 하면 그래도 대충 웃어넘기겠지만, 이 ‘순결’은 주로 여성의 처녀성을 ‘지키는’ 것으로 통용된다. 여성의 성은 결혼 전에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정체성을 띠고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해, 누구에게서 지키는 것일까. 신부가 입는 새하얀 드레스와 하얀 면사포 역시 그 순결의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신부에게 결혼식이란 온통 순결함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결혼식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나는 신랑과 동시입장을 할 생각이라 말했다. 딸의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어가 사위에게 딸을 넘겨주는 행진을 할 기회가 사라진 아버지는 약간 아쉬움을 드러냈다. 키운 딸을 다른 남자에게 넘기는 그 이상한 의식을 내 아버지도 당연히 아버지가 해야 할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누구이며 나의 몸은 무엇인가. 누가 나를 소유하고 있는가. 나의 몸은 그 자체로 나다. 누구도 나를 인수인계할 수 없다. 여성이 ‘순결의 길’을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 신랑의 손으로 넘어가는 이 의식이야말로 남성이 여성을 교환하는 가장 노골적인 순간이다. 결혼‘식’에서 신부를 ‘오늘의 주인공’으로 대우하는 관행은 결국 여성이 교환의 개체임을 알려준다. 이 교환 의식을 치르지 않는 일조차 설득과 설명이 필요하건만, 한쪽에서는 요즘 ‘여성권력’을 실감한다는 한탄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예전에는 마음 놓고 하던 차별을 예전만큼 ‘못하게’ 되니 이를 ‘역차별’이라고 한다.
한 개그맨의 막말이 논란이 되었다는데, 미디어에서의 막말이 아니더라도 머리가 터질 듯한 혐오발언과 저질 농담을 일상에서 종종 듣는다. 비하와 혐오가 취향과 의견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나혜석이 1934년 잡지 <삼천리>를 통해 발표한 ‘이혼고백장’의 지적처럼 참으로 이상한 심사를 가진 이들이 많다. 어느 사회나 차별하고 차별받는 집단이 왜 없겠냐만, 차이는 차별의식의 방치 여부에 있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며 혐오발언 당사자를 옹호하는 그 대단한 연대정신 덕분에 혐오는 계속 반복된다. 자정작용을 하지 않는 사회에서 차별은 차별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모습이란 관계를 통해 보이고 만들어지기에 나와 잘 알고 보면 모두 좋은 사람일 수 있다. 연쇄살인범도 알고 보면 여리고 순수하며 좋은 사람일 수 있는데, 그까짓 혐오발언을 던진 사람이야 얼마든지 좋은 사람일 수 있다. 전쟁에서 여성을 잔인하게 성폭행한 군인들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문제로 여겨져야 하는 차별의식이 이렇게 ‘좋은 사람’의 외피 속에서 보호받고 있다. 공금으로 을이 갑의 성매매 비용을 대납하거나 이를 ‘뇌물죄’를 적용하여 수사하거나, 모두 여성 인권과는 무관한 ‘좋은 사람’들의 업무이다.
평소에 ‘일베’에 대한 악마화를 오히려 의아하게 여겼던 이유는 혐오발언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굳이 일베라는 집단을 끌어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가 싫어 아이에스(IS·이슬람 국가)가 좋다는 ‘김군’을 두고 “걔 혹시 일베 하는 거 아니야?”와 같은 말을 한다. 차별의식을 가진 이들을 일베라는 울타리에 몰아넣는 태도는 더욱 위험한 진단이다.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수록 일상의 평범한 차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여성을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넘기는 의식을 꾸준히 진지하게 치르듯이.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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