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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혁신계의 풍운아 ‘커널’ 고정훈 / 남재희

등록 2015-04-30 18:29수정 2015-04-30 21:00

‘커널 고’의 실패는 학생, 민중에 의지한 때문이고, ‘커널 김’의 성공은 막강한 군을 동원한 때문임을 알고 있다. 한국 정치사의 풍성한 이해를 위해 ‘커널 고’를 재활시키고 싶다. 또 다른 한국의 모색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김종필씨를 풍운아라고 한다. 나는 거기에 비록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혁신계의 풍운아 고정훈(高貞勳)씨를 추가하고 싶다. 고씨는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으로 일본의 아오야마학원에서 영어를 연마하고, 만주 하얼빈 북만학원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등 대단한 어학 실력을 쌓고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의 조선민주당계 인사들과 연계되어 소련 점령군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소련 공보원에서 통역원 일을 했다 한다.

그가 1947년 월남할 때 미리 연락을 받은 미군이 38선에서 대기했다가 그를 곧바로 반도호텔로 안내했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그는 미군이 중요시할 정보를 많이 갖고 온 모양이다. 그가 밝힌 내용 한 가지는 이렇다.

“그 당시 소련 점령군 당국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를 통하여 좌우합작·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한 후, 미·소 양국을 한반도로부터 철수케 하고, 곧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공산 쿠데타와 같은 쿠데타를 한반도에서 일으켜, 우리나라를 공산위성국가로 만들려고 획책했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소련 측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가능성이 있었겠구나 싶다. 그는 미 24군단 정보처에서 일하고, 미소공동위원회 미측 대표단에서도 근무했다. 육사 7기 특별간부후보생을 마친 그는 유엔한국위 연락장교,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미군사고문단장 특별보좌관을 지내고 육본 정보국 차장에 이른다. 유엔군사령부 근무 중 미 육군성 파견대 근무와 더불어 중령으로 예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그를 ‘커널(colonel) 고’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휴전 후 <코리안 리퍼블릭> 편집국장을 잠깐 거쳐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된 그는 ‘k생’이란 서명의 칼럼으로 이름을 날린다. 특히 네루나 나세르 등 제3세계의 민족주의운동에 관한 것이 관심을 끈 것으로 기억한다.

4·19가 나자 그는 마침 학생데모대 행진 코스에 위치했던 조선일보 사옥의 베란다에서 학생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고, 데모 행렬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 그는 학생데모에 자기를 일체화시키려 했다. ‘구국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발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학생·청년 중심의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당시 보수적인 여야 지배세력의 분위기는 허정 과도정부 수반의 말마따나 “혁명적 사태를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습한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4대 국회는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하고 총선거를 치르려고 하였다. ‘커널 고’는 그 절차가 학생혁명의 요구와 어긋난다고 보았다. 지난날의 과오에 책임이 있는 ‘오욕’(汚辱) 국회는 즉각 해산을 하고 새 국회를 구성해야 마땅하지 어떻게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헌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할 때는 미구에 군사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도 했다.

그는 국회의장을 방문하여 자기의 뜻을 전달했다는 것인데 오히려 공무방해죄로 구속이 되어 6개월의 서대문형무소 생활을 했다.

형무소에서 나온 그는 당시 혁신정당으로서는 가장 큰 정당인 통일사회당(통사당)의 선전국장이 되어 맹렬한 활동을 하였다.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하여 외신기자들과 회견하는 그는 그때의 정치인들 가운데 단연 돋보였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아스완 댐을 건설하는 등 인기가 있었으며, 또한 서베를린 시장이기도 했던 서독의 사회민주당 지도자인 빌리 브란트가 존경을 받았었다. 풍운아 제이피(JP)나 ‘커널 고’ 모두 아마도 나세르를 마음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고정훈씨는 브란트의 정치노선을 택했다. 브란트를 자신의 정치모델로 하였음을 말한다. 공산주의와 분명히 대결하는 사회민주주의(또는 민주사회주의) 노선이다. 북을 경험하고 넘어온 그는 반공 입장을 대단히 분명하게 하였다.

“제가 지향하는 승공·민주사회주의에 대하여…” “승공혁신의 노선이 잡귀들한테 먹혀버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통사당은 어디까지나 반공적 혁신노선과 승공·민주사회주의를 내세웠으나…” “승공·민주사회주의 정강, 정책.”

요즘 말하는 종북몰이를 의식해서였겠지만 그는 거의 모든 발표에서 “승공”, “반공”을 강조했다. 그러나 4·19의 학생 폭발 후에 연쇄폭발한 군의 폭발은 그를 봐주지 않았다. 그는 5·16 후 혁신계 일제탄압에 휩쓸려 6년 반 동안이나 길고 긴 형무소살이를 했다.

4·19 공간에서 혁신세력은 남북협상파와 중립화통일론 사이에 분열이 있었고, 점차 타협이 불가능하게 대립을 했다. 그 당시 학생 사회에서도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열자는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한편 미국의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을 내세우는 등 중립화 논의가 국제사회에서도 얼마간 있어 그것이 국내에서의 논의를 자극하기도 했다.

통사당은 남북협상을 내세우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의 주류에 대항하여 치열한 논쟁을 하였다. 고정훈 선전국장이 그 논쟁의 전위였다. 그는 남북협상을 하자는 측을 극렬하게 공격하여 “김일성 서울입경(入京) 환영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이야기냐”고도 했다. 당시 경제발전 수준에서 북측이 남측보다 앞선 사정을 고려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5·16을 당하고 그는 그때의 혁신운동에 관해 두 가지 반성하는 이야기를 했다. 첫째는 이른바 악법반대대회와 거기에 이은 야간데모에 대한 반성이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던 그 대회는 혜화동 장면 총리 집 근처까지의 야간데모로 이어졌으며 야간이 되자 횃불데모로 변질되었다. 고씨는 그때의 통사당이 ‘잡귀’에 말려든 듯하다고 후회한다. 그때의 데모는 5·16 세력에 편리한 명분을 준 것이 사실이다.

둘째로 중립화통일론에 관한 설명 부족이다. “통사당의 공표된 정강, 정책은 물론, 당내 토론에서도 만장일치 결의된 내용은, 압록강·두만강 일대에 유엔감시군을 배치한다는 전제조건 아래서만 한국의 중립화 통일은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휴전선을 압록강·두만강으로 밀어 올려 놓자는 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공산 측 선전을 봉쇄하고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관할권을 압록강, 두만강까지 미치도록 하자는 저의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후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나는 4·19 사태에 관한 고씨의 안목이 올발랐던 것이라 여긴다. 4·19는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민주주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빈곤 탈피(경제발전)를 위한, 남북통일을 위한 복합적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번 폭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학상 연쇄폭발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수습은 ‘비혁명적’ 방법으로는 안 되고 ‘혁명적’ 방법을 따랐어야 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정보기관에 오래 있었던 ‘커널 고’의 일련의 언동을 보면 그는 그런 혁명의 역학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군정보기관의 또 다른 ‘커널 김’이 그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용하여 성공하였지만 말이다. ‘커널 고’의 실패는 학생, 민중에 의지한 때문이고, ‘커널 김’의 성공은 막강한 군을 동원한 때문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커널 고’의 선량한 예측 착오였다. 독일의 사민당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권하기도 했던 강력한 정당이다. 그리고 한국은 6·25를 치른 나라고…. ‘커널 고’는 시대를 좀 일찍 살았다 하겠다.

뒷날 신군부가 등장한 후 고정훈씨는 민주사회당을 창당하여 11대 국회에 당선되었으며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다. 권력 측의 은밀한 도움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국 정치사의 풍성한 이해를 위해 풍운아 ‘커널 고’를 재활시키고 싶다. 그것은 또 다른 한국의 모색을 위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남재희 언론인
남재희 언론인
지금 빈부격차의 심화 등 한마디로 상황은 악화만 되고 있다. 오죽하면 여당의 유승민 원내대표까지도 당론에서 벗어나 정책방향의 대전환을 내세우고 있겠는가.

신자유주의의 거친 물결 속에 지금 길이 잘 안 보인다. 길이 보여야 다수의 힘이 움직일 터인데 말이다. 수가 많다 보면 길이 열리는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본다.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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