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계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창조주인 인간의 시대가 저물고 창조물인 기계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신들의 황혼’인 라그나로크 신화의 미래판 서사는 사이버 펑크의 단골 소재이다.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가 그 예다. 정말로 근미래에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까? 확실히 그렇다. 걱정해야 할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대부분은 승자인 기계의 편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뇌의 구조와 원리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의학의 발전 속도는 더디다. 반면 신경망 공학과 컴퓨터 기술의 발전 속도는 눈부신데, 우리가 뇌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뇌를 전산화하는 기술이 완성될지도 모른다. 유체역학 이론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지만 인류가 오래전에 비행기를 발명해낸 것처럼 말이다. 대표적인 미래주의 공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우리 자신이 바로 인공지능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예측에 따르면 2020년대에는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이, 2030년대에는 인간 뇌의 전산화에 필요한 연산능력과 기술이 갖춰진다. 전뇌 기술을 실현하는 장애물은 과학보다는 법과 윤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단 물꼬가 트이고 나면, 뇌 복제를 통해 수명을 값싸게 연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영화와 만화의 복제조차 막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뇌 복제 기술이 보급되면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당분간은 전뇌가 생물학적 뇌의 백업본에 머물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체가 수명을 다하고 ‘설치 가능한 소프트웨어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 늘어난다. 전뇌의 성능을 생물학적 한계를 넘도록 개선시키고자 하는 시도 역시 막을 수 없다. 누구나 의사나 변호사나 과학자가 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순식간에 습득할 수 있는 우수한 존재가 되길 원한다. 이 무한경쟁의 끝에서 우리 대부분은 혁신적으로 진화된 인간이자 전혀 인간이 아닐 터다. 기계화를 거부하고 생물학적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 잔여 인류의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미 종이 분리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미개한 구인류들은 끝없이 앞서 나가는 우리 신인류에 대항한 테러를 저지를 수도 있다. 최후의 전쟁은 반드시 그런 식으로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매트릭스에 가둬 적절히 통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 구인류가 우리 신인류를 낳은 선조나 다름없는데다, 종적 다양성의 보존을 고려한다면 박멸은 현명한 발상이 아니다.
과학적 전망은 그다지 충격적일 게 없다. 우리가 해야 할 고민은 비과학에 기반한다. 먼 미래까지 상상력을 확장할 필요조차 없이 지금, 바로 이곳, 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의 한복판인 대한민국을 들여다보라. 차원을 건너뛰는 진화적 성장으로 압도적 우월성을 확보한 자본과 권력, 그리고 철기시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생산성을 보유한 시민들이 공존하는 곳. 명백한 이해상충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전쟁을 보기 어렵다. 잘 짜인 체제가 매트릭스처럼 사회 전체를 감싸 통제하고 있다. 빨간 알약을 택해 삼킨 불온한 러다이트들은 조용하게 색출된 뒤 빠르게 제거당한다. 현실의 지각은 현실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인 까닭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최소한이나마 체제의 속박에 동의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끔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내가 정말로 신인류인가? 거대한 숫자와 추상화된 권력으로 구조화된 새로운 지배종에 나도 속하는 걸까?” 짧은 저항 끝에 짐승처럼 사냥당해 쓰러진 원시적 구인류들의 뼈와 살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저 미개하고 조잡한 부적응 개체들의 생김새가 어쩐지 우리와 더 닮아 보이기 때문에.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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