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4일 오전 10시15분, 대법원은 서초동 1호 법정에서 이른바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 재심에 대한 선고 공판을 한다. 재판 결과에 따라 사반세기를 끌어온 희대의 사건이 마무리될 수도 있게 된다.
지난해 2월 고법은 비겁하고 후안무치했다.
이번 재심의 핵심은 김기설의 유서를 강기훈이 대필했는가 여부를 가리는 데 있지 않다.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본원적인 핵심은 자살 방조 혹은 자살 사주가 실제로 있었는가를 가리는 데 있다. 만약 이러한 행위가 실재하지 않았다면, 국가권력으로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행위의 범인으로 특정된 강기훈은 당연히 무죄한 것이 된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행위를 범죄로 인정하고 기소 혹은 판결한 국가권력의 행위가 원천적으로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난해 고법은 김기설의 유서 필적이 강기훈의 필적과 다르다는 사실만 인정했을 뿐 유서의 필적이 김기설의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리고 여전히 김기설의 분신이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의한 것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고법의 판결대로라면,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지 않은 것은 인정되지만, 김기설이 제3자의 사주를 받고 자살했다는 검찰의 기소 내용과 이를 범죄 구성으로 인정한 초심 법원의 판결 또한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된다. 다른 재심 때와 달리 판결 후 고법이 무죄를 인정받은 강기훈에게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거듭 말하건대 이번 사건의 본질은 강기훈 개인의 누명을 벗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 행위인 유서 대필 사건 조작이라는 국가폭력의 실재성을 밝히는 데 있다.
이른바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의 피해자는 의외로 많다. 대법원의 정당한 재심 판결로 최소한의 명예나마 회복해야 할 사람은 강기훈 외에도 많다는 뜻이다. 무고한 누명으로 자신의 일생은 물론 가족, 친지까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받은 강기훈은 말할 것도 없다. 국가권력의 폭력으로 김기설은 자신의 목숨조차 남의 사주를 받고 내주는, 그나마도 제 유서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남이 써준 대로 하는 얼치기로 낙인찍혔으며, 그 가족과 친지 또한 그에 따른 오욕과 아픔을 강요받아야 했다. 또한 당시 김기설, 강기훈과 생각과 뜻을 같이했던 무수한 사람들 역시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쯤은 언제라도 수단화하는 파렴치한으로 손가락질받으며 24년을 지내야 했다.
14일 대법원의 판결은 이들의 손상받은 명예와 피해에 대해서도 답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에게 행한 국가폭력에 대해 진솔한 반성과 사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판결이 어려운가? 전혀 어렵지 않다. 김기설이 유서를 직접 썼는지 여부, 다시 말해 김기설과 유서 필적의 동일성 여부만 판단하면 된다. 유서와 김기설의 필체가 동일하다면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했다는 전제 위에 자살 사주와 유서 대필의 시간, 장소 등 범죄 구성의 기본 사실조차 특정하지 못한 채 창작된 검찰의 공소 사실과 이를 인정한 초심의 판결은 당연히 원천 무효가 된다. 자살 방조의 범죄 구성이 원천 무효가 된다면 당연히 강기훈은 무죄인 것이고, 필자가 아는 강기훈이 진정으로 원하는 신원 방식은 이렇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서를 김기설이 직접 쓴 것이 인정되면 자신의 결단과 희생으로 소신한 김기설 죽음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제 목숨 하나 제 뜻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놈으로 비아냥받아온 24년간의 억울함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명예회복은 이루어지는 셈이다. 또 이 시간은 사람의 목숨을 수단화시키는 파렴치한으로 내몰렸던 수많은 사람들의 명예 또한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원일형 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국 부장
원일형 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국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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