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구개발(R&D) 정책 혁신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핵심은 두 가지다. 그동안 분산 관리되던 18조원의 국가 연구개발 사업을 하나로 통합하고, ‘묻지마 연구’에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쉽게 말해 “그 연구 돈 되나?”를 반드시 묻겠다는 뜻이다. ‘2015년 미래창조과학부 업무보고’에는 박근혜 정부 과학기술정책의 철학이 압축되어 있다. 과학기술은 경제부흥을 위해 2017년 국민소득 3만달러를 견인하고, 국민행복을 위해 삶의 질 향상을 추구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국가경제를 위해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놀랄 일은 아니다.
더 놀라운 표현은 그다음에 등장한다. 과학기술은 창조경제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선도형 연구개발 체계로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창조경제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창조경제란 박근혜 개인, 혹은 정부의 정책수단이지 향후 국가의 발전을 위한 전략을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기막힌 것은 “성과 조기 가시화를 위한 역량 총집결”이 필요하다는 미래부의 홍보자료다. 쉽게 말해 박근혜 정부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대박 나는 성과를 찍어내라는 뜻이다. 기준과 시한을 정해 놓고 찍어내는 창조적 연구란 없다. 거기서 등장할 창조적 인물이래야 황우석 정도일 것이다. 창조는 죽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창조’만 말살 중인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 말살 중이다. 김성수는 ‘미래창조과학부-과학기술 행정체제의 진화와 역행’이라는 논문에서 미래부 설계도에 담긴 결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당시 조직구조에만 치중된 논의는 조정기구와 연구회 등 과학기술 행정체제를 위한 중층적 제도를 무시했고, 그 결과 잘 운영되던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공론화 과정도 없이 폐지되어 버렸으며, 과학기술자들은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정책적 혼란의 기저에 관료주도적 행정체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즉, 독일이나 미국 같은 혁신적 연구기관이 자리잡으려면 과학기술인 스스로 과학기술행정을 수행하는 자율성이 필수적인데, 한국 사회의 관료집단은 이를 인정하지 못한다. 과학기술정책의 본질은 기획이나 예산조정인데, 관료들은 연구개발 사업 진행까지 좌우하려 한다. 관료들의 조직이기주의가 과학기술정책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이명박 정부는 이승만 시대의 문교부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시대의 국가주도 방식으로 과학기술정책을 후퇴시키고 있다. 미래도 죽었다.
해방 정국에서 친일파 상류층 자제들이 법학/의학으로 자기 살길만 고민할 때, 국가 재건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인물들은 경성대학 이공학부의 과학기술자들이었다. 조선의 과학과 공학을 대표하던 이태규(화학)와 리승기(공업화학)를 필두로, 박철재, 도상록, 김동일, 김봉집 등은 과학기술을 통한 국가 재건을 꿈꿨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월북했거나 한국을 떠났기 때문이다. 리승기는 월북해서 북한의 과학영웅이 되었고, 이태규는 도미해서 1973년까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자연대와 공대의 동창회 명부엔 이들이 없다. 그렇게 한국과학기술의 1세대는 조국에서 배제당했다.
미래부엔 창조도 미래도 없다. 오히려 구태와 과거로 돌아가고 있음이 명확하다. 그렇다면 다음 일어날 일도 예측할 수 있다. 이 나라의 과학기술자들은 한국을 떠날 것이다. 과학기술자들이 떠나버린 국가엔 미래가 없을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 도와준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린이들에게 한 말이다. 한국의 미래에 과학자들이 존재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할 것이다. 우주가 나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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