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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아시아 귀환’ 대 ‘아시아의 축’ / 김창진

등록 2015-05-13 18:32

러시아 전역에서는 9일 ‘대조국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우크라이나와의 내전 와중에서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에서도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1783년 이래 러시아 땅이었다가 소련의 흐루쇼프 시대에 우크라이나에 이양됐던 크림 반도의 ‘귀환’ 1주년을 축하했다. 분리 독립 내전이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 루간스크에서도 소련군의 희생과 승리를 기리는 행렬이 이어졌다.

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쫓겨난 2014년부터 독일에 대한 승리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전승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지 않다. 지난해 발발한 내전에서 러시아계 주민들을 학살한 우크라이나 정부군 내 파시스트 세력의 정치적 복권도 방조하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적 기억의 정치’와 우크라이나의 ‘기억 말살의 정치’가 부딪히고 있다.

행사에서 단연 눈에 띈 대목은 하루 종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옆자리를 지킨 시진핑 중국 주석이었다. 서방 정상들이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날, 시 주석 내외는 붉은광장을 누빈 중국군의 퍼레이드를 ‘여유 있는 동맹군의 회심의 미소’로 지켜보았다.

모스크바 당국은 기념식 직후인 5월11일 지중해에서 양국의 해군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다고 발표했다. 지난 4월 러시아는 S-400 방공망 시스템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서명했다. 양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각각 ‘일대일로’라는 중국의 실크로드 재건사업과 ‘유라시아연합’이라는 러시아의 경제동맹 전략의 추진에서 서로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서방의 경제 제재를 돌파하면서 최근 미국-일본의 밀착에 대응하는 러-중 동맹 강화이다.

유라시아 정세를 좌우하면서 한반도의 운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미국의 ‘아시아 귀환’과 러시아의 ‘아시아의 축’ 대립 전선이 분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기념식의 앞자리를 차지한 반면,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와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이 기념식에 불참했다. 러시아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유라시아 연합의 진로가 그리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나토가 ‘유라시아 심장지대’에 위치한 옛 소련권 국가들을 향해 동진하고 있다. 러시아가 이들을 효과적으로 포섭하지 못하면, 외교적 고립 탈피와 부국강병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의 구상은 쉽게 실현되기 힘들다. 서방측 경제 제재는 최근 러시아의 농업과 일부 제조업이 활성화되는 역설적 효과가 없지 않다. 외세의 간섭과 포위가 러시아 국민들의 단결과 ‘고난의 행군’에 대한 의지를 강화시킨 역사적 경험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붉은광장 연설에서 푸틴은 연합국의 2차대전 승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거쳐 베를린까지 진격한 소련군의 기여에 힘입은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소련 인민 2500만명의 희생을 대가로 한 승리가 없었다면 20세기 유럽 전체가 파시즘 치하에 들어가는 암흑의 시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설의 방점은 특정 국가의 패권주의와 적대적 블록화 논리를 뛰어넘는 국제질서의 구축을 호소하는 데 찍혔다. 유엔 등 국제기구가 평화구축자의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한 푸틴은 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신냉전’에 대한 우려가 결코 자국의 팽창주의에 있지 않고, 러시아가 국제협력과 평화질서의 구축을 지향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김창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김창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다른 서방 정상들처럼 이 행사에 불참했다. 파시스트 조상을 둔 원죄를 버릴 수 없는 그는 행사를 ‘정치적으로’ 건너뛰고 그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 목적이 단지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는 무명용사비에 헌화하는 것에만 있진 않을 것이다.

김창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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