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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최고의 농사 / 이라영

등록 2015-05-27 19:03

자랑거리가 없어서 자랑을 못하지, 대단한 군자가 아닌 이상 자랑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대놓고 자랑이냐, 은근한 자랑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자랑을 하지 않는 인간이 되려면 그 역시도 꽤 훈련이 필요하다. 자랑의 종류도 가지가지다. 부모의 돈 자랑, 배우자 직업 자랑, 며느리와 사위 자랑, 손자의 외모 자랑부터 본인의 각종 능력에 이르기까지 자랑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며 상당히 구체적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자기 딸의 시누이의 남편의 학벌까지 자랑한다. 그러나 자랑 중에 자랑은 아무래도 자식 자랑이 제일이 아닐까. 잘난 자식은 제 인생의 잘남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결과물이다. 자식농사 잘 지었네.

오랜 기간 땀 흘려 일하고 고생한 끝에 수확물을 얻는 농사, 이 농사 중에 최고는 자식농사라는 말이 있다. 자식이라는 인간이 수확의 결실을 맺어야 하는 투자 대상이며 그 자식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 자식이 부모의 노후 보험이다. 누구를 위한 인생일까. 아침방송에 한 유명한 소설가가 나와서 자신의 효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한 다음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차를 몰고 장터를 다니며 모친에게 자랑할 기회를 줬다고 한다. 일종의 금의환향 퍼레이드다. 그것이 마치 자식으로서 도리인 듯 말하는 모습을 보며 효도란 과연 부모의 자랑이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나의 의문과는 별개로 현실은 어쨌든 그렇게 돌아가긴 한다.

내가 가끔 머무는 소도시에는 이따금 자랑하는 현수막이 걸린다.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현수막이 서로 시시콜콜 알고 지내는 좁은 마을에서는 등장한다. 원래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란 아는 사이에 더욱 참을 수 없이 솟구치는 법이다. 아무개네 형제가 사무관 승진을 했다고, 아무개군이 어느 ‘명문대’를 갔다고, 고시에 합격했다고, 축하하는 ‘경축’ 현수막이 동네 어귀에서 펄럭인다. 일일이 찾아가서 자랑할 필요 없이 한 번에 알릴 수 있으니 효율적이다. 이는 학교나 학원에서 홍보를 위해 입시 합격생 현수막을 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집안의 영광이며 부모의 명예를 세우는 자랑이다.

아직도 관존민비 사회이며 학벌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니까 작은 마을에서 크게 자랑하고 싶겠거니,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며칠 전 색다른 현수막을 보았다. “아무개(부)와 아무개(모)의 아들, 아무개군 중등부 우승”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시장 입구에 있었다. 우승한 분야가 뭔지는 글씨가 작아서 안 보였지만 부모의 이름은 선명하게 빛났다. 부모의 노골적 등장이 놀라워 이런 사례가 또 있는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꽤 있었다. 자식이 이룬 성취가 점점 부모의 경제적 투자와 비례하는 세상이니 자식의 우승은 부모의 우승이다.

얼마 전 초등학생의 시 한편에 어른들이 ‘패륜’이라며 부르르 떨며 온갖 분노를 터뜨린 일이 있었다. 결국 학생의 시집은 전량 폐기되었다. 한 인간을 오직 ‘자식’이라는 정체성으로만 바라보는 탓이다. 게다가 자식의 성공과 성적에 기울이는 관심에 반해서 그 ‘작은 인간’이 가진 감정과 정서는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시를 그대로 출판하게 한 시인의 부모는 오히려 자식의 생각을 독립적으로 보장한 셈이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부모들의 등골이 휘는 투자에도 자식들은 행복하지 않다. 여전히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며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의 40% 이상은 성적 때문이라고 한다. ‘엄친아’나 ‘엄친딸’이라는 은어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자식들의 패배감을 보여준다. ‘잔혹’하다는 초등학생의 시보다 ‘최고의 농사’인 자식농사야말로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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