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7~18일 한국을 찾은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미군부대에 가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하는 연설을 했다. 케리 장관의 연설은 계산된 행위로서 우리 정부에게 “이제는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말고 미국의 뜻에 따르라”는 압력으로 비쳤다. 이는 이달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확정하고 돌아가라는 사전 압력이었다. 케리의 미군부대 발언이 국내에서 논란거리가 되자 미 국무부는 “우리 내부에서 오고 가는 얘기를 편하게 했을 뿐이다”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그가 다녀간 뒤 우리 정부의 입장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3 노(No)’(요청 없었고, 협의한 적 없고, 결정된 것 없다)를 주문처럼 외어대던 우리 정부(청와대 대변인)가 “요청이 오면… 주도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케리의 언행은 역시 계산된 행위였고 효과가 발생한 셈이다. 우리 정부가 ‘3 노’를 사실상 철회한 셈인데 제발 ‘3 예스(Yes)’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미국은 이번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그동안 ‘치고 빠지기’ 식으로 살금살금 그려온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마저 그려 넣고자 할 것이다. 미국의 뜻이 그렇다면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은 확실한 입장을 정립한 뒤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 “미국 대통령이 공식 요청을 했으니 한-미 간에 협의를 시작할 것이다”라는 정도로 대응하고 돌아와서는 안 된다. 분명하게 선을 긋고 돌아와야 한다.
앞으로의 국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박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2002년 1월29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의회 국정연설에서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대북 군사행동까지 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일 뒤인 2월20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뒤 부시 대통령은 ‘도라산역 연설’에서 “북한을 공격하지 않고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이런 변화는 김대중 대통령이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가면서 100여분 동안 부시 대통령을 설득한 결과였다. 박 대통령도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5000만 국민의 안위와 국익을 위해, 13년 전 김대중 대통령처럼 혼신의 노력으로 사드 배치를 막아주었으면 한다.
미국은 재정절벽 때문에 앞으로 8~9년은 국방예산을 매년 500억달러씩 삭감해 나가야 한다. 제작을 주문해놓은 사드 개발도 끝나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북핵과 미사일을 핑계 삼아, 가능한 한 사드 구입비를 한국에 떠넘기려는 것 같다. 사드 1개 포대 값은 20억달러 가까운 거액이라고 한다. 연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8억~9억달러보다 훨씬 많은 액수다. 따라서 사드를 배치하면 우리 국방예산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중국이 우리에게 경제 불이익을 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은 많은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이미 지적을 했고, 사드 논란 초기부터 우리 경제단체들이 사드 배치를 반대한 것도 같은 이유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와 함께 국가경제도 책임지는 자리다. 사드 배치 뒤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우리 경제가 휘청거리면 우리 국민들의 원망이 북한이나 중국 쪽으로만 가지는 않을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갈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사드 문제로 한-미 관계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오바마한테 이해시켜야 한다.
황재옥 원광대 초빙교수 ·평화협력원 부원장
황재옥 원광대 초빙교수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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