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말 아일랜드를 다녀왔다. ‘남북한의 무기체계 변화가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하는 동국대 연구팀이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등과 함께 마련한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달 28~29일 수도 더블린에서 진행된 학술세미나는 아일랜드 학자들과 한국 학자들이 각각 자국의 분단과 평화 문제에 대해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식민과 분단을 함께 경험한 두 나라 학자들이 상대방 나라 상황에서 영감을 얻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필자 또한 아일랜드가 평화협정 과정에서 ‘북아일랜드까지를 자국 영토로 규정했던 헌법 제2조를 포기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일랜드는 평화협정의 정점인 1998년 ‘성금요일협정’ 체결 뒤 1999년 국민투표를 단행해 이 조항을 없앴다. 그 뒤 아일랜드는 영토조항 포기를 통해 북아일랜드와의 실질적인 평화에 더욱 접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우리 헌법 3조를 지킴으로써 평화를 얻고 있는가? 아일랜드처럼 그것을 포기할 때 한반도 평화는 실질적으로 좀더 진전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일랜드에서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다.
아일랜드는 12세기 초부터 시작돼 750년 가까이 영국의 직간접 통치를 받았다. 영국의 식민정책은 혹독했다. 이는 1921년 7월 아일랜드를 방문한 도쿄제국대학 경제학 교수 야나이하라 다다오(1893~1961)가 1927년 출간된 저서 <아일랜드 문제의 발전>에서 전한 더블린의 빈곤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많은 이들이 매우 남루한 차림을 한” 더블린에서 “거의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더러운 아이들의 몰골”을 보고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적었다. 반면 그의 눈에 비친 북아일랜드 중심지 벨파스트는 “런던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훌륭한 번화가와 상점”들이 즐비한 도시였다.
이는 영국이 피통치 민족인 아이리시와 식민지로 건너와 정착한 잉글랜드인을 얼마나 차별했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에서 건너온 잉글랜드인이 60%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영국은 가톨릭교도인 아이리시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한 뒤, 이것을 신교도인 잉글랜드 이주민에게 몰아주는 등 각종 차별정책을 실시했다.
이것이 1922년 아일랜드가 자치국이 됐을 때, 북아일랜드가 영국령으로 계속 남게 된 결정적 배경이다. 또 ‘60%의 잉글랜드 이주민들과 40%의 아이리시 원주민’으로 구성된 북아일랜드가 내전과도 같은 상호간의 테러에 오랫동안 시달린 이유이기도 하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는 분단 이후 여러 차례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됐던 것은 북아일랜드 내 잉글랜드 이주민들의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영토조항 삭제는 이 공포심을 해소시켜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실질적 평화논의 진행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한반도는 어떤가. 우리의 헌법 3조와 북한의 조선노동당 규약은 서로를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로 옭아매고 있다. 북한은 2010년 노동당 규약을 개정했지만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의 과업을 수행’한다는 규정은 바꾸지 않았다.
그 공포심으로 인해 남북은 상대방의 행동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국방력을 키우는 것만이 유일한 안전보장책이라 믿는다. 이런 상황에서 다가올 미래는 남북 모두 ‘흐림’이다.
‘영토조항을 없앤 아일랜드 사례가 현재의 한반도 갈등을 풀어갈 실마리가 될 순 없을까?’ 귀국 뒤에도 머릿속에서 궁금증이 떠나지 않는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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