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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그녀의 뒤틀린 민생감각 / 한귀영

등록 2015-06-21 18:52

서울 위쪽, 경의선 철길을 따라 오일장들이 늘어서 있다. 내 즐겨 찾는 단골 어물전, 빈대떡집도 거기, 금촌장에 자리잡고 있다. 장날과 주말이 겹치는 날, 북적대는 시장통을 거닐며 살아간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근대화와 함께 정기시장이 사라지리라고 예견했다. 서구에서도, 한국에서도 그 예견은 틀렸다.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점원이 영혼이 거세된 감정노동을 하는 동안, 오일장의 어물전 주인은 뾰로통한 얼굴로 오늘은 좋은 물건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오늘 덜 팔아도 단골을 놓칠 순 없다는 경제적 계산일 수도, 단골에 대한 인간적 솔직함일 수도 있다. 아무튼 장터에서는 영리에도 영혼이 깃든다.

이 경의선 오일장 이곳저곳이 휴장에 들어가고 있다. 당연히 메르스 탓이다. 자영업으로 대표되는 민생 위기 상황이 심상치 않다. 외환위기 때나 세월호 참사 이후보다 더 심각하다는 말도 나온다. 오죽하면 여당 대표조차 지금 서민들에게는 메르스 감염보다 생계의 위협이 더 공포스럽다고 했을까? 이런 상황에서 무능한 정부를 향해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은 퍽 당연하다.

민생 위기의 정치화 조짐은 여론조사 수치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갤럽이 6월 3주차에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든든한 지지층이었던 자영업층의 국정수행평가는 긍정평가가 32%로 평균 29%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그쳤다. 부정평가는 62%로 평균 61%보다 오히려 높았다. 자영업층이 대체로 경기에 민감하고 안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높아 보수 여당의 오랜 지지 기반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자영업층의 이반이다. 이전과 비교해 보자. 세월호 참사 이후 박 대통령 평가가 최저치(40%)로 하락하던 작년 7월에도 자영업층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각각 46%, 48%로 반반이었다. 민생을 내세워 세월호 위기를 돌파하려 한 박 대통령의 행보가 적어도 자영업층에서는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올해 2월 연말정산 파동 등으로 박 대통령 평가가 29%까지 추락할 때도 자영업층의 박 대통령 평가는 긍정 33%, 부정 60%로 지금보다는 양호했다.

자영업의 위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문제는 자영업으로 표상되는 민생 위기가 정치적 분노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징후는 이명박 정부 중반인 2010년 즈음부터 나타난 바 있다. 민생 위기 속에 그해 6월 지방선거와 10월 재보선에서 보수 여당은 무상급식 등 복지 어젠다를 내세운 야당에 연거푸 참패했다. 화들짝 놀란 보수 여당은 민생을 명분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등의 어젠다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정치 감각이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낳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약속과는 달리 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불리하거나 여론이 악화될 때만 민생을 강조했다. 그 와중에 유체이탈 화법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사태를 남의 일인 양 평론하는 기이한 태도를 통해 그녀는 정부와 자신을 ‘성공적으로’ 분리해냈다. 비판자들에게는 코미디지만, 지지자들에게는 연민이다. 못난 아랫것들 때문에 고생하는 지도자, 그녀는 슬프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얼마 전 박 대통령이 동대문시장을 찾았다. 청와대는 그녀가 산 패션 아이템들을 홍보했다. 아이돌 스타를 모방하는 대중심리처럼 국민들도 민생을 살리려는 그녀를 따라 시장에 가리라는 계산일 게다. 하지만 아이돌 광고 쓰는 시장 상인은 세상에 없다. 시장에 필요한 것은 안심과 돈이지 광고모델이 아니다. 메르스를 막고 서민들 지갑 채울 궁리에 24시간이 모자라야 할 사람이 광고모델 노릇을 하고 있다. 그 뒤틀린 민생감각에 자영업자들의 삶이 뒤틀린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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