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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메르스와 일차의료, 주치의 / 정명관

등록 2015-06-22 18:39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내적으로 곪아터지고 있었던 한국 의료의 처참한 민낯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구멍 뚫린 방역, 위기 때 적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 감염에 취약한 병원 입원실의 문제, ‘의료쇼핑’과 대형병원 응급실로의 집중으로 인한 감염 확산 등이 그것이다. 당연히 각각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개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의료제도의 근본 문제점을 망각하고 정치권이 흔히 그러듯이 생색내기나 보여주기식 해결책에만 집중한다면 이 모든 개선 노력도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의료의 근본 문제는 취약한 공공성과 부실한 일차의료에 있다. 환자는 병·의원을 거의 무제한으로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으며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3분 진료’라는 말이 말해주듯 시간에 쫓겨 병력을 듣고 상담을 하는 것은 소홀히 되기 쉽고 검사에 주로 의존하게 되고 한두번에 낫지 않으면 환자는 쉽게 다른 병·의원을 찾아간다.

이런 의료 환경에서 첫번째 메르스 환자는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확진을 받을 때까지 네 군데의 병·의원을 옮겨 다니며 30여명을 감염시켰다. 70여명을 감염시키며 2차 확산을 일으키게 된 열네번째 환자도, 그다음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메르스를 확산시킨 다른 환자들도 여러 곳의 의료기관을 이용하면서 메르스를 전파하게 되었다. 방역당국 또한 환자의 이동 경로와 이용 의료기관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13일 세계보건기구(WHO)와 한국 보건복지부의 합동평가단도 국내 메르스의 빠른 확산 원인으로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여러 의료기관을 돌아다니는 이른바 ‘의료쇼핑’ 관행과 환자가 넘치는 응급실 등 우리 의료문화를 지목한 바 있다. 만약 일차의료가 잘 정착되어 있고, 환자들이 자신의 주치의를 갖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정부는 해외 유입 가능성이 있는 주요 전염병과 주요 질병 정보를 수시로 주치의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해외여행 후 열이 난 첫번째 환자는 자신의 주치의를 방문하여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진찰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평소 환자의 건강 상태를 잘 아는 주치의는 단순한 약 처방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환자의 상태에 대하여 더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잘 낫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환자가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의료쇼핑을 하기보다는 상세한 소견을 적어서 적절한 상급 병원으로 의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자의 질병은 좀더 일찍 진단될 수 있었을 것이고, 설사 진단 시기가 좀 늦어졌다 하더라도 환자가 접하는 의료기관은 현재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환자의 동선은 명확히 파악되었을 것이므로 감염의 확산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가 단일 생활권인 만큼 앞으로도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은 언제라도 우리 곁에 나타날 수 있다. 국가 전염병 전담병원 건립이라든지, 감염병 대응조직 보강이라든지 조금씩 정치권에서 논의하고 있지만, 눈앞에 드러난 문제점만을 고치는 방식은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 감염병 문제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건강검진을 받는다든지 무조건 대형병원 응급실로 몰린다든지 하는 고질적인 문제도 근본적으로 건강 문제를 지속적으로 상의할 수 있는 주치의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정명관 개원의·일차의료연구회 홍보위원
정명관 개원의·일차의료연구회 홍보위원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고 증진하는 것이 의료의 주목적이다. 정부는 의료영리화니 원격의료니 하면서 일차의료를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시도를 즉각 중단하기를 바라며, 의료전달체계 개선과 주치의 제도를 포함한 일차의료 강화에 의료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둘 것을 강력히 주문한다.

정명관 개원의·일차의료연구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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