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7월부터 병역기피자들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제도가 실시된다. 당국이 엄선할 몇 명의 ‘기피자’들을 평생 ‘비국민’으로 만들고 그 자손들까지 수치심 속에서 살게끔 한다고 ‘신의 아들’들이 속속 논산훈련소로 떠날까?
‘기피자’들을 향해 다수의 분노가 들끓을 때 그들은 득의의 미소를 띨 것이다. “왜 자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라고 물어본 김수영의 말대로 대중들의 분노 흐름을 조절하려 하는 이 사회 관리자들의 의도에 넘어가면 안 된다.
나라, 즉 시민 공동체는 늘 감정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곳에서 일상을 공유하며 또 그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같은 언론에서 소식을 얻으면 부득불 집단적으로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공유되는 감정이란 꼭 자연발생적인 것만은 아니다. 국가나 대자본이 소유하는 언론들이 언론소비자들의 집단 감정 상태를 조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 의한 집단 감정 조절의 가장 유명한 사례라면 2002년 월드컵일 것이다. “오늘날 응원에 나서지 않으면 간첩이다!”와 같은 메시지가 거침없이 라디오를 통해 나왔다. 응원의 광기에 미국 장갑차에 깔려 죽은 두 여중생도 민영화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철도·발전·가스 노조의 공동파업도 다 묻히고 말았다. 최근 철도 민영화에 맞선 투쟁을 다시 한번 겪은 우리로서는, ‘4강’이 중요한가 아니면 공공부문을 지키는 게 중요한가를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02년 당시 언론은 다수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평소의 애국주의 세뇌 등을 바탕으로 한 판의 집단 광란을 벌이게 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집단 감정 중의 하나는 바로 분노다. 이상할 것도 없다. 근·현대사의 고통에 대한 집단기억도 한몫을 하리라. 하지만 한국인 개개인의 삶은 비교 가능한 산업화된 국가들의 주민 대부분에 견줘 훨씬 더 고통스럽기에 당연히 분노심은 쉽게 일어나는 것이다. 한국과 멕시코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가장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재사망률도 최근 10년 1~3위를 다투고 있다. 한국에서 구직급여(실업수당)를 받을 수 있는 최장기간은 240일에 불과하지만, 유럽은 위기에 봉착한 그리스조차 450일 동안 실업급여 수령이 가능하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나, 사회복지의 부실함으로 봐도 한국 사회의 생산능력에 비해 한국인의 삶은 대단히 고통스럽다. 이런 사회에서 기본적 사회심성으로서의 분노심을 잠재울 수 있겠는가?
국가와 언론이, 잠재울 수는 없지만 분노 흐름의 방향을 다수가 눈치채지 않게 살짝 조절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의 병역기피자 신상 공개 문제를 짚어보자. 한국 군대는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들이 집중된 시공간이다. 이미 특권이 세습되는 사회답게, 누가 뭐라 해도 ‘신의 아들’ 중에서는 군대에 가지도 않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늘 “합법적 이유”를 들곤 한다. 삼성가만 보더라도 이건희 회장은 정신질환으로 군 면제를 받았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의 특명으로 그래도 40일간 훈련을 받았다는 설이 있어 분분하지만, 좌우간 3년간 복무를 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승마 국가대표 선수까지 지낸 그의 아들 이재용 부회장이 하필이면 허리 디스크로 군 면제 판정을 받았으며, 또 한 명의 ‘삼성가 3세’인 이재현 씨제이(CJ)그룹 회장은 유전병으로 군에 안 갔다. 일반인의 군 면제율이 6.4%이며 재벌가라 해도 33% 정도지만, 삼성가 남성들은 73%의 기록적인 면제율을 자랑(?)한다. 굳이 기피할 것도 없이, 모든 문제들이 거의 태생적으로(?)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국내 10대 재벌 가문 출신 628명을 조사한 한 연구팀은, 이들 가운데 미국 출생자가 119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 국적을 가진 자라면 기피할 필요도 없이 태생적인 특권들을 편안하게 누리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신의 아들’, 아니면 최소한 군에서의 좋은 보직을 보장해줄 수 있는 현대판 ‘육두품’, ‘오두품’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다면? 군에 끌려가서 이 사회가 실제 작동하는 방식을 몸으로 익히게 된다. 폭력·폭언을 수반하는 철저한 상명하달의 구조부터 사고가 다반사인 장시간·고난도의 훈련·노동까지. 군보다야 강도가 덜하지만 국내의 일반 직장도 본질상 군조직과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군이란 국내외 ‘신의 아들’에게 엄청난 배당금을 만들어주는 한국 ‘노동력’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굳이 분노하자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최대화하고 군이라는 ‘순량한 노동력 양성소’를 지탱하는 이 사회 특권층을 상대로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런 분노와 함께 군 감축, 군인 인권 보호의 강화, 나아가서 남북한의 공동 군축과 모병제로의 전환 등을 위정자에게 요구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 수백만명의 한국 젊은이들에게 인생 최악의 공포와 부담이 되는 ‘군대 문제’를 본질적으로, 발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박정희 시절부터 정권은 병역 부담과 그 부담 분담의 불공평성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정권에 의해 특별병역관리 대상자로 분류된 ‘신의 아들’들은 유신 시대라 해도 “합법적 사유”로 면제받거나 비교적 편리한 방식으로 최소한의 복무를 하곤 했지만, 정권과 언론은 당시부터 병역기피자들을 다 같이 때려잡아야 하는 ‘비국민’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행정전산화 등 국가적 ‘통치성’의 제고로 1970년만 해도 13%였던 병역기피율을 1974년까지 0.1%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 국가가 주민등록증 지참 필수화와 불심검문 등 온갖 감시와 통제 기제들을 이용하면서 필사적으로 “일소”하려 했던 그 기피자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그들 중에서는 상류층을 흉내내려 했던 중산층도 있었지만 군의 폭력성에 공포감을 느끼는 서민들도 적지 않았다. 또 가족 생계 책임에 대한 부담으로 몸이 망가질 가능성이 높은, 군에 가는 것을 회피하려 했던 빈민층도 있었다. 실제 1953년 이후 한국군에서의 사망자 수(베트남전 제외)가 거의 6만명에 이를 정도로 자살과 인명사고가 많은데, 빈민 젊은이들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의 죽음이나 장애는 가족 전체의 생계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살인적인 고문과 7~8년까지 되는 장기투옥을 당하면서 자신들의 양심이 용납할 수 없는 군복무를 강요당했던 여호와의 증인 등 병역거부자들도 유신 시절에 ‘병역기피자’로 분류됐다. 박정희 정권의 ‘기피자 사냥’의 정치적 의미는, 결국 소수에게 치부의 기회를 주면서 다수의 건강과 행복을 희생시켰던 권위주의적 산업화가 만들어내는 각종 사회적 모순, 특히 노동계급·빈민층과 중산층 사이에 벌어지는 격차로부터 다수의 눈을 돌리게 하며 권력을 불법적으로 장악한 한 무리 정치군인들을 마치 사회정의의 전도사처럼 이미지 조작 하는 것이었다.
유신 시대와 달리 직장에까지 찾아가서 ‘기피자 색출’을 벌이는 것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권과 보수언론들은 지금도 같은 종류의 정치 쇼를 벌인다. 국회를 통과한 병역법 개정안과 병무청이 발표한 시행령에 따라 올해 7월부터 병역기피자들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제도가 실시된다.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새로운 법의 명분은 여전히 ‘사회정의’이지만, 법 개정의 정치적 의미는 ‘특권층 병역기피’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박근혜 정권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게끔 만들려는 것이리라. 그러나 당국이 엄선할 몇 명의 ‘기피자’들을 평생 ‘비국민’으로 만들고 그 자손들까지 수치심 속에서 살게끔 한다고 해서 과연 ‘신의 아들’들이 속속 논산훈련소로 떠날까? 현 총리를 포함하여 한국 특권층의 전형적인 행동패턴은 “의학적 이유”로 면제를 받거나 적절한 시점에서 한국 국적을 조용히 포기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는 특권층들이 법 개정에 영향받을 리 만무하다. 신상이 공개된 ‘기피자’들을 향해 다수의 분노가 들끓을 때 그들은 득의의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왜 자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라고 물어본 김수영의 말대로 피해 대중들의 분노 흐름을 조절하려 하는 이 사회 관리자들의 의도에 넘어가면 안 된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억압과 착취, 무복지와 기업천국 노동지옥의 체제 그 자체가 분노의 대상에 오르는 그날, 우리 운명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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