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아름다운 밥타령 / 이라영

등록 2015-07-22 18:43

내게 강아지를 맡기고 부모님이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떠나며 엄마가 하는 말, 여행 가면 뭐가 제일 좋은 줄 알아? 밥을 안 해도 되잖아. 대신 나의 일거리는 늘어났다. 강아지의 식사와 간식을 며칠간 챙겨야 하는데 나는 엄마처럼 ‘정성스럽게’ 직접 만들기는 번거로워서 통조림을 샀다. 개밥과 사람밥 모두 평소에는 엄마의 일이다.

얼마 전 타이베이의 장제스(장개석) 기념관에 들렀는데 장제스가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들이 밀랍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유리 진열장 위로 고개를 숙이며 맛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그런데 장제스의 밥상은 누가 차리고 치웠을까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대통령의 맛집>이라는 책도 있고, 종합편성채널에서 <대통령의 밥상>이라는 방송도 만든 적이 있으니 ‘중요한’ 사람이 되면 그들의 밥도 중요해지는 법이다. 어떤 대통령은 소박한 자연식을 즐긴다고 한다. 소박해 보이는 나물무침도 실은 조리 과정이 결코 소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소박한 밥상’이라는 말을 경계한다. 대부분의 밥상은 상당한 노동과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어디 밥상뿐일까. 사먹지 않는 한 보리차든, 결명자차든, 물도 누군가는 끓여야 한다.

요즘 잘나간다는 한 외식업체 사업가를 비판하는 글을 읽다가 혼자 손뼉을 치며 웃었다. “웬만한 음식에도 설탕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는 순진한 고백 때문이었다. 6월이면 불티나게 팔리는 매실과 설탕이 우리 밥상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면 새삼스럽게 설탕에 놀라는 법이다.

우리는 흔히 돈벌이를 ‘밥벌이’라고 하며,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표현을 쓴다. 밥상은 그 자체로 시대와 공간, 계층의 상징이며 과학과 취향의 집합체이고 내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밥상은 곧 정치다. 학교급식은 가장 정치화된 밥상이다.

‘예능’이라는 이름으로 연애, 결혼, 육아, 요리 등의 일상이 티브이 속에 스며들었다. 특히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일상의 노동인 육아와 요리가 방송을 통해 주로 남성들이 체험하는 예능이 되어버린 현상이 흥미롭다. 남성 연예인들의 ‘체험, 삶의 현장’이 될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육아와 가사는 지독히 성별 분업화 되어 있다. 하지만 ‘셰프’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남성이 나서면 전문화, 직업화된다. 이들을 아빠로만 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요리는 ‘아빠 밥’으로 불리지도 않는다. 반면 여성들은 엄마 밥을 지어내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미안해한다.

밥하는 주체가 여자라는 대전제는 변할 줄을 모른다. 미디어는 이러한 성별 분업화를 계속 부추긴다. 한 항공사 광고의 ‘일하는 아내’ 편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나는 구시렁거리고 있다. 퇴근 후 집으로 또 출근한 슈퍼우먼 아내에게 아름답다 말해주라니. 어떤 방송에서는 급기야 엄마 밥과 아내 밥을 대결시키는 구도를 만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여-여 갈등으로 보이는 고부갈등이 실은 어떤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지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급기야 딸네 집에 왔다가 다음날 새벽 5시에 장인의 밥을 위해 집을 나서는 장모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개그맨을 보고 있자면 나는 어느새 폭발한다. 그렇게 아름다우면 함께 아름다워지면 안 될까.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정성, 헌신, 희생, 사랑 등을 강요하지 말자. 밥하기 노동에 대한 몰인식은 수많은 (여성) 식당노동자가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현실에서도 드러난다. 식당노동자나 보육교사처럼 여성들의 집 안 노동에서 연장된 노동은 대부분 저임금이다. 젖은 손이 애처로우면 고무장갑을 사줄 것이 아니라 직접 설거지를 하고, 고급 냉장고와 여자의 행복은 별개라는 인식이 필요하며, 퇴근 후 밥 차리는 아내에게는 아름답다고 말하기보다 함께 밥을 차리면 된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1.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2.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3.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4.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5.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