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은 비밀공작의 절대적인 필수 요건이다.”(리처드 헬름스 전 미국 중앙정보국장) 최상급자는 몰랐다고 연관성을 부인하면서 실무자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국가나 조직의 책임을 모면하는, 조직 보호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증거가 없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럴듯한 부인’을 도저히 들이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1960년 5월1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서 S-75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됐다. 조종사는 중앙정보국(CIA) 소속이었다. 미국은 조종사가 죽었을 것으로 보고 “기상관측 중이던 항공우주국(NASA) 항공기가 실종됐다”고 짐짓 발표했지만, 이틀 뒤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조종사를 체포했다고 발표하면서 바로 뒤집혔다. 5월7일 미 국무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재가를 거친 성명이라며 “비무장 민간기 한 대가 아마도 정보수집 목적으로 소련 영공을 비행했을 것”이라고 사실을 인정했다. 흐루쇼프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해 5월20일로 예정된 정상회담 취소는 정찰비행 그 자체보다 아이젠하워가 책임을 인정한 것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
해외 비밀공작의 온갖 더러운 수법을 미 국내에까지 들여온 연방수사국(FBI)의 ‘파괴분자 대응 정보활동’(코인텔프로: counter intelligence program)이 1971년 연방수사국 지부 사무실을 턴 8명의 젊은이들과 언론에 의해 시행 15년 만에 폭로됐을 때도 정부는 끈질기게 축소와 은폐를 시도했다. 3년 뒤 구성된 상원의 처치 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대외관계에서 미국의 책임을 피하려는 ‘그럴듯한 부인’을 국내정책 결정 과정에까지 적용해 헌법상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이 해킹 의혹과 관련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실무자가 한 일만 부각하려는 듯하다. 이런 일의 승인권자인 대통령은 아예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 증거가 없다고 생각한 때문일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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