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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인성교육의 외주화 / 전정윤

등록 2015-07-28 18:34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평가기관이에요.”

올해 초 한 고1 학생이 토로한 말이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자신이 경험한 교육과정을 ‘대하 인터뷰’로 들려줬는데, 장시간 취재 과정에서 이 말이 유독 아프게 와닿았다. 주요 교과 내용은 학원에서 배우고, 기타 과목은 집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선 그저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받을 뿐이라는 답답함의 표현이었다.

아이들 눈에도 학교가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공인 성적표 발급 기관으로 ‘추락’한 듯해 안타까웠다. 그 무렵 강남 지역 공립 초등학교 교사의 강단있어 뵈는 해명이 큰 위로가 됐다. 이 학교는 집값 비싸기로 소문난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다. 재학생 중엔 ‘귀한 집 자제’들이 태반이고, 국영수와 미술, 피아노, 운동은 물론 교과서에 나오는 동요까지 학원에서 선행을 하고 오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한계를 모르는 사교육의 위세에 주눅이 들 법도 한데, 교사는 오히려 당당했다.

“요즘엔 외둥이도 많고, 아이들이 대부분 자기중심적이에요. 부모님들이 말로야 자녀들을 잘 가르치시죠. 하지만 다들 애지중지 귀한 자녀라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성교육을 가정에서 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학원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찾아가는 곳인데, 무슨 공동체 교육이에요. 함께 어우러져 사는 걸 배울 수 있는 곳은 이제 학교밖에 없어요. 교사들이 학부모 민원을 겁내지 말고 아이들한테 공동체 삶을 가르쳐야 해요. 그런 면에서 공교육의 역할이 더 커졌다고 봐요.”

학습적인 측면에서 공교육이 사교육에 빼앗긴 위상을 되찾을 날은 요원해 보이지만, 날로 중요해지는 인성교육만큼은 학원이 학교를 대체할 수 없으리라는 교사의 말에 수긍이 갔다.

교육부가 최근 인성교육진흥법 시행령을 발표했다. 국회의장이 법안을 발의하고 우리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들이 만장일치로 법안을 통과시켰으니, 인성을 법으로 강제하겠다는 무모한 실험의 책임을 교육부한테 돌릴 수는 없다. 국영수 위주에서 인성 중심으로 교육의 문화와 풍토를 바꿔보겠다는 진정성까지 굳이 외면할 필요도 없다. 다만 법까지 만들어야 할 정도로 중차대한 인성교육을 학교와 교사가 아닌 전문 기관과 강사한테 위탁한 부분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교육부는 전문 기관을 지정해 인성교육 프로그램과 교육과정 인증 업무를 위탁하기로 했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보수 성향 단체들이 꾸린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인실련)이 독점적인 인증권을 행사하고 있다. 교육부가 앞으로도 계속 인실련에 인증권을 주겠다고 한 적은 없으나, 교육계에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교육부는 아울러 대학, 출연연구기관, 공익법인 등을 인성 전문인력 양성기관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사교육에 밀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공교육의 본질’마저 인성 전문 기관과 강사들의 ‘밥벌이’로 떼준 셈이다.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인성교육 프로그램들의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인성교육진흥법을 보면 인성의 핵심 가치로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을 열거한다. 내가 불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과 공동체를 우선시해야 하는 덕목들이다. 외부에서 수혈된 정형화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길러지는 됨됨이가 아니다. 더구나 ‘인성교육의 외주화’가 정착되면, 이해집단의 생리상 나중에 학교가 제 역할을 하고 싶어도 되찾아오기 힘들다. 어차피 인성교육은 하루아침에 성과를 거두기 어려우므로, 학교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외주화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인성마저 뒷전일 정도로 절박한 경쟁교육 체제를 수술하고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맺는 학교 현장에, 사람됨을 배우고 가르칠 여유를 주는 게 지름길일 수 있다.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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