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흐름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은 독립운동사에서 끊임없이 대립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좌우 이념 대립의 기원이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에서나 가끔 낭만적으로 등장하는 아나키즘 세력이 있었다. 한국 현대사를 좌우의 이념 대립으로만 이해하는 이들은, 독립운동사의 주요 장면에 항상 등장하는 아나키스트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는 아나키스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그들은 남한에서는 무정부주의자라는 오명으로, 북한에서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라는 매도로 차별받았다. 그리고 테러리즘이라는 극단적 직접행동이나 현실 파괴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영화 <아나키스트>는 바로 그런 왜곡된 역사의 대표적 표상이다.
19세기 동아시아에 처음 받아들여진 서구 사상들 중 기독교를 제외하고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단순화하는 동시에, 이를 무리하게 사회로 외삽시켜 당시 서구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사회학 이론이다. 서구의 강력한 기술문명에 압도당한 당시 지식인들에게, 사회진화론은 동아시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사상으로 여겨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서구에 종속된 동아시아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헤맨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모든 지식인이 스펜서에게 동조했던 것은 아니다. 스펜서와 함께 동아시아에 스며든 사회주의 사상은 왕권과 권위주의에 신음하던 동아시아 민중에게 해방의 이념이 되었다. 우리에겐 그 사회주의가 곧 마르크스주의로 이해되지만, 1920년대 초반까지 동아시아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계열과 아나키즘 계열로 양분되어 있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의 적기(赤旗) 사건, 1920년 북한지역에서 일었던 장도원의 ‘민권평등과 무정부주의 운동’, 1920년 변사 정한설의 아나키즘 선동 사건 등, 아나키즘은 당시 조선뿐 아니라, 중국 신해혁명의 주역 쑨원(손문)과 일본 ‘천황’ 암살의 기획 등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이 널리 받아들인 아나키즘은 과학자 크로폿킨의 ‘상호부조론’이었다. 크로폿킨은 러시아의 동물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의 왕자로 불리는 인물이며, 훗날 하나의 전통이 되는 과학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의 상호부조론은 동물학자인 크로폿킨이 바라본 자연과 사회를 아우르는 사상이며, 스펜서에 대항하는 거의 유일한 이념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민족주의자로만 기억하는 신채호가 바로 크로폿킨에게 세례를 받고 말년에 아나키스트로 거듭난 인물이다. 민족주의 역사가 신채호의 사상은 크로폿킨을 만나며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도 교류하는 국제주의자로 거듭나게 된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아나키스트들이자, 항일운동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신채호, 이회영, 김원봉, 유림, 그리고 유자명 등이 모두 크로폿킨의 과학적 아나키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유교와 서구 사상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던 구한말, 이들은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과학적 아나키즘의 이상이 공자 사상의 원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아나키즘은 여전히 암살과 함께 기억되겠지만, 21세기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탄생, 시민운동, 그리고 온라인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모두 아나키즘에 빚지고 있다. 크로폿킨의 말처럼, “아나키즘이란 자연과학의 귀납/연역적 방법에 의해 얻어진 종합을 인간의 여러 제도의 평가에 적용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암살 너머에 있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