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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롯데와 함께 ‘쇼’를 / 정남구

등록 2015-08-09 18:44

지난달 27일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이 일본 도쿄 롯데홀딩스 본사에서 임원들을 불러놓고 ‘해임’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아버지를 등에 업은 신동주 전 일본 롯데 부회장의 ‘경영권 쿠데타’라고들 했다. 쿠데타라기엔 너무 어설프다. 한편의 ‘소극’이라 해야 맞겠다. 일본 회사법은 임원 해임을 주주총회에서 의결하도록 하고 있다. 대표이사라고 임원들을 멋대로 해임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면, 신입사원 교육부터 다시 받아야 할 일이다.

신동주 전 일본 롯데 부회장은 입만 열면 93살 고령의 ‘아버지’를 거론한다. 아버지가 누구의 해임을 지시했고 누구를 어디에 임명했다고, 그러니 그렇게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7일 일본으로 출국하면서도, 신동빈 회장이 엘(L)투자회사의 대표로 등록한 것은 아버지 모르게 한 일이라고 말했다. 신 총괄회장이 몰랐을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 회사의 대표이사 등기가 이사회 의결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그에게는 오로지 ‘아버지의 뜻’이란 말뿐이다. 벌써 환갑을 넘긴 분인데….

5대 재벌 롯데의 형제간 경영권 싸움이 근래 보기 드문 구경거리가 됐다. 그런데 씁쓸하다. 진흙탕 싸움이라서만이 아니다. 숨죽이고 있는 수많은 롯데 안의 미생들 얼굴이 아른거려서다. 그들은 자괴감과 함께 불안감에 몸을 떨고 있다.

한국 롯데 계열사 사장 37명이 신동빈 회장 지지 성명을 발표한 것은 비극이다. 충성맹세라니! 누군가 이들을 줄 세웠든, 이들이 자발적으로 줄을 섰든 사장단의 행동은 롯데가 근대적인 기업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쓰쿠다 다카유키 롯데홀딩스 대표가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에서 강조한 ‘법과 원칙’, ‘근대적 경영’을 조롱한 꼴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희극과 비극이 섞인 이 쇼를 완성하려 한다. 꼴불견인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 정작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을 통해 드러난 롯데의 낡은 소유·지배구조와 경영 행태를 고치는 일이다. 그런데 처방은 이상한 곳을 향하고 있다. 정부는 롯데홀딩스와 광윤사 등의 소유구조를 드러내라고 롯데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공개한다고 총수 전횡이 바뀔까, 회의적이다. 새누리당은 2013년 공정거래법 개정 이전에 이뤄진 순환출자 해소를 검토한다 하다가 하루 만에 없던 일로 했다.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은 세무조사 확대와 롯데의 면세점 사업권 재검토를 거론했다. 죄없는 소액·소수주주와 롯데 직원들에게 피해가 더 크게 미칠 수도 있는 칼을 함부로 뽑으라니, 가볍다.

정부로선 신씨 일가가 괘씸했을 것이다. 대사면에 재벌 총수를 끼워넣으면서, 재벌을 앞세워 투자와 일자리 창출 분위기를 한바탕 연출해 보려던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으니 말이다. 단지 그것뿐, 총수 일가 전횡을 청산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재벌 총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칼인 상법 개정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 공약’에 맞춰 2013년 4월 소액·소수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상법 개정안을 마련해 입법예고까지 한 바 있다. 재벌들이 반대하자, 곧 꼬리를 내렸다. 실수로 낳은 사생아를 그동안 잘 감춰뒀는데, 롯데 사태를 계기로 문밖으로 나올까 봐 꽹과리를 다른 쪽으로 끌고 간다.

정남구 경제부장
정남구 경제부장
분위기를 파악한 롯데는 2018년까지 2만4천명을 신규고용하겠다고 재빨리 발표했다. 14일엔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있는 부산에서 불꽃쇼를 한다. 머잖아 쇼는 다 끝나고,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눈을 딴 데로 돌릴 것이다. 그리고 재벌 총수의 ‘황제경영’은 그대로 ‘안녕’할 것이다. 한바탕 재밌는 구경거리 봤으니, 된 것 아닌가?

정남구 경제부장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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