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모이세, 아네스…’
천주교 대북지원단체 ‘평화3000’ 운영위원장인 박창일 신부는 8·15가 다가오면서 신자들의 본명을 나직이 불러본다. 모두 평양 장충성당 신자들이다. 북녘 신자의 본명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신부님의 마음이 일렁거린다.
박 신부는 올해 6·15와 8·15 남북공동행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공동행사가 성사돼 교류의 물꼬가 트이면 평양을 다시 찾아 북녘 신자와 미사를 드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이제 사실상 무산됐다. 시민단체들이 올해 초부터 준비위원회를 꾸려 서울·평양 남북공동행사 개최를 위해 노력했지만, 대립적 남북관계를 넘지 못했다.
박 신부가 장충성당 신자를 처음 만난 것은 첫 방북 때인 2001년 1월이었다. 그때 ‘적어도 1년에 한번은 북녘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공동행사 무산에 따라 올해도 이를 실천할 수 없을 듯해 마음이 조급해진다.
첫 방북 미사 때 박 신부도 감격스러워했지만, 북녘 신자들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박 신부의 장충성당 미사 집전은 남한 출신 신부로서는 세번째였다. 그 전에는 1988년 장충성당 건립 때 바티칸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장익 신부와, 1989년 평양축전에 참가한 문규현 신부가 미사를 집전했을 뿐이다.
천주교에서는 신부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 특히 예수의 몸을 상징하는 밀떡을 나눠 먹음으로써 예수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성찬의 전례’는 신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신부가 없을 때는 평신자들끼리 모여 서로 강론하며 말씀만을 나누는 정도다.
박 신부는 이런 사정을 접하면서 ‘북녘 신자들과 미사를 드리는 것이 신부로서 어쩌면 가장 큰 대북지원활동’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햇볕정책 시기, 그는 ‘1년에 한번은 미사’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방북은 수시로 이루어지면서 1년에도 여러 차례 신자들과 미사를 드렸다.
첫 방북 미사 뒤 남쪽에 돌아오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혹시 가짜 신자는 아니냐”는 질문을 했다. 박 신부는 직접 만나보면 어느 누구도 그런 의문은 갖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번은 박 신부가 방북 때 수녀 한분을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장충성당 신자들이 수녀님 곁에 몰려들어 아이처럼 기뻐했다. 눈물을 흘리는 이도 많았다. 성당에 신부들이 오는 경우는 간혹 있어도 수녀가 오신 건 처음이라고 했다. 박 신부는 신자들의 눈물에서 그들의 진심을 보았다.
만나지 못하면 의심만 늘어난다. 현재 남북의 모습이 그렇다. 박 신부가 대북지원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방북한 것이 2011년이었다. 2012년과 2013년엔 종교 교류 명목으로 각각 한차례씩 방북해 ‘1년에 한번은 미사’ 약속을 힘겹게 지켰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떤 명목으로도 북에 가는 게 불가능했다. 박 신부만이 아니었다. 전체 남북 교류가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남북 교류가 이렇게 감소할수록, 남과 북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그래서다. 올해 8·15 공동행사는 비록 무산됐지만, 박 신부는 남북 교류 재개의 꿈마저 포기하진 않았다. 그것만이 작게는 장충성당 신자들을 위한 길이며, 크게는 적대감만 늘어가고 있는 남북 전체를 치유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신자들과 다시 만나 미사를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장충성당 신자들이 다시 생각나서였을까, 신부의 목소리에 물기가 젖어들었다.
남북 교류 단절의 아픔이 박 신부만의 아픔이 아니듯이, 남북을 다시 잇겠다는 다짐 또한 박 신부만의 다짐은 아닐 것이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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