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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암살’, ‘독립운동’과 ‘활극’ / 임범

등록 2015-08-10 18:22

이소룡이나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혁명이나 독립운동 같은 실제 역사의 투쟁 공간에 들어와 활약하는 영화! 그런 걸 보고 싶어 한 적이 있다. 왜? 실제 투쟁은 엄숙하고, 처참한 폭력과 마주해야 하고, 공동체에 복무해야 하고, 자유롭지도 않은 대신, 이소룡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온 활극엔 단독자의 자유와 낭만이 있고, 무엇보다 폭력의 통쾌함이 있어서였을 거다. 그러니까 역사의 발전이라는 당위에 활극의 쾌감을 덧씌우려는, 좋은 것들만 택하려는, 실제론 불가능한 유아적 발상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나쁜가. 잘 안 붙는 것들을 붙여보려는 데서 새로운 게 나오지 않나.

<황야의 무법자>의 감독 세르조 레오네가 연출한 <석양의 갱들>(1971)이 그랬다. 멕시코 혁명을 배경으로, 직업적 혁명가와 도둑놈이 혁명군 편에 서서 활극을 펼친다. 폭파 전문가이기도 한 혁명가가, 정부군이 다리 위에 집결했을 때,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로 다리를 날려버린다. 명장면으로 꼽힐 만큼 멋있게 찍혔다. 새롭고, 새로워서 멋있었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이렇게 낭만적으로 연출해도 되는 거야?’ ‘허무함, 폭력의 덧없음, 그런 것도 담고 있잖아.’ ‘그걸 담으면 용서되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어려운 문제다.

한국 영화가 르네상스를 맞은 2000년 이후에, 일제강점기를 활극의 무대로 삼은 영화가 몇 편 있었다. 일제강점기는 멕시코 혁명보다 훨씬 무겁다. 식민 잔재 청산이든, 분단이든 모든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다. 그 중압감을 어떻게 할까. <아나키스트>의 주인공들은 의열단을 탈퇴하고 독립적으로 항일 테러를 벌이면서 시대의 중압감도 너무 쉽게 벗었다. 홍콩 누아르식 액션을 펼칠 때 그들의 시대가 모호해졌다. <모던 보이>의 ‘먹물’ 주인공은 식민지 경성의 퇴폐적 낭만에 더 젖어들었으면 싶었는데 곧 독립투쟁의 중압감에 눌려 낭만은 움츠러들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영리했다. 일제강점기의 만주라는 무대만 빌릴 뿐, 나머지는 다 털어냈다. 독립운동하는 총잡이에게 다른 친구가 묻는다. ‘넌 이 일 왜 하냐?’ 총잡이가 ‘나는…’ 하고 입을 여는 순간 다른 친구가 코를 골고 잔다. 끝이다. 더는 시대의 맥락이나 대의명분 같은 걸 묻지 않는다.

<암살> 개봉 전에 시나리오를 봤다. <놈, 놈, 놈>과 같은 전략을 취할 줄 알았는데 다른 선택을 했다. 실제 독립운동의 역사를 많이 등장시키고 강점기 이후 친일파 청산의 모티브까지 다루고 있었다. ‘활극’과 ‘독립운동’이 잘 어울릴까. ‘의로운 기색이 숨어 있는 살인청부업자’, ‘운명이 갈린 쌍둥이’ 같은 픽션의 장치가, 시대의 중압감을 버텨낼까. 막상 영화를 보니 잘 붙었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붙이면서 긴장감은 살리되 모나게 튀어나오는 것이 없도록 정리정돈을 아주 잘한 느낌이었다. 강렬하거나 새로운 느낌은 약했는데, 둘을 붙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 같기도 했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내가 시나리오를 읽고 예방주사를 맞은 상태에서 영화를 봐서 그런 거 아냐? 남들 견해를 살펴봤다. 아닌 게 아니라 비판하는 쪽은 대체로 ‘활극’과 ‘독립운동’이라는 두 요소가 잘 안 붙는다고 보고 있었다. 친일파의 암살에 성공하는 대목을 두고 한 친구는 “영화 속에서나마 정의가 실현된 것 같아 매우 좋았다”는 반면, “친일파가 건재한 역사의 암울함을 드러내려면 암살에 실패하도록 했어야 한다”는 후배도 있었다. 역시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난 한 친구의 말에 동의한다. “단순한 권선징악이라도 좋다. 그 시대를 끌어와 그걸 구현했다는 데에 박수를 보낸다.” 무거운 역사의 문을 열고 들어간 <암살>의 선택을 지지한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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