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땅에도 미군 잠수함과 항공기가 종종 나타나곤 했다. 1944년 6월부터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고 같은 해 11월에는 도쿄에 첫 공습이 이뤄진 터였다. 해안 지역에서는 어민들이 미군과 직접 접촉하는 경우도 있었던 듯한데, ‘미군이 생선값으로 미국 지폐를 주며 가까운 시일 내에 사용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거나 ‘조선인은 일본인과 구별되도록 조선옷을 입으라고 했다’는 등의 목격담이 돌았다. 개중에는 ‘경성이 폭격됐다’는 등 사실과 다른 소문도 있었지만, 일제 총독부 기관지가 유일한 언론이었던 당시로선 미군의 출현과 이에 대한 목격담은 일반인이 일제 패망의 징조를 알아챌 수 있는 소중한 정보였다. 당연히 입소문으로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이를 ‘불온 언론’이라 하여 처벌했다. 일제 검찰이 작성한 월간 보고서인 <조선검찰요보>를 보면, 1944년에만 ‘적 잠수함 출몰’에 관한 이야기로 89명, ‘공습’에 관한 이야기로 139명이 처벌됐다. 이와 함께 ‘전국’(戰局)에 관한 언급이나 ‘조선독립 몽상’ 등으로 적발된 불온 언론 사범은 모두 1640명에 이른다.(‘<조선검찰요보>를 통해 본 태평양전쟁 말기(1943~45)의 조선 사회’)
불온 언론을 통해 일제 패망에 대한 기대가 세간에 퍼지면서 조선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했는데, 예금을 인출하거나 현물을 사재기하거나 농지를 사들이기도 했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도 늘어났다. 일본 본토에서도 일제 패망을 예견하며 독립운동에 나서는 조선인 투쟁조직들이 결성됐다. 해방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검거된 조직도 있었다.
식민 지배에 고통받던 수많은 사람들이 ‘불온 언론’에 의지하며 해방의 꿈에 다가서던 시기에, 정세를 가늠할 고급 정보를 접했을 게 분명한 친일 인사들은 패망해가던 일제에 끝까지 협력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해방 뒤의 변신을 준비했을 터이니 그 행태가 더욱 가증스럽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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