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에 북한이 굳이 김양건 노동당 비서를 내보내려고 하고 남한은 기어코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을 보곤 남북이 동상이몽을 꾸는구나 하고 느꼈다. 북한은 남북의 군사충돌 위기를 남북관계 전반의 개선으로 풀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반면 남한은 반드시 비무장지대 지뢰폭발 사건의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구나 싶었다.
북한의 입장을 이해 못할 건 없다. 이미 “지뢰매설 안 했다”고 공식 발표한 마당에 지뢰가 부각되면 남북이 ‘했느니, 안 했느니’ 입씨름밖에 더 하겠는가. 그러니 프레임을 바꿔 접근하는 수밖에. 남북관계 발전의 대의를 위해 남쪽은 확성기를 끄고 북쪽은 준전시상태를 해제하기로 했다, 이런 큰 틀의 합의에 지뢰를 녹여내자, 이런 시나리오를 짜지 않았을까. 그러니 남북관계 총책임자 김양건 비서가 애초 ‘급’도 안 된다던 통일부 장관과 동급으로 ‘격하’되는 수모도 감수했으리라.
실제 회담 진행도 그랬던 것 같다. 북쪽은 내내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뢰를 우회하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남쪽이 책임 인정과 사과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니, 북쪽의 의도는 결국 희망사항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북쪽이 회담 막바지인 24일이 되어서야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며 사과 문제를 논의할 용의를 내비쳤다고 하니, 22일부터 내내 서로 같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쇠귀에 경을 읽은 셈이다. 그래도 어느 쪽도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으니 참 대단한 인내심이지 싶다. 하긴, 회담 결렬은 곧바로 남북간 군사적 정면충돌로 이어질 텐데 어떻게 쉽게 판을 엎어버리겠는가. 8천만의 삶과 죽음이 걸린 일인데.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27일 국회에서 ‘누가 지뢰를 매설했는지’를 명기하지 않고 유감을 표명하는 방식의 이번 절충에 대해 “남쪽을 상대로 북쪽이 명확하게 사과한 첫번째 사례”라고 자랑한 것은, 어려운 성취에 대한 자부심으로는 이해되나 학자적 엄밀함에는 안 맞는 것 같다. 북한의 이런 유감 표명은 몇 차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공언한 “확실한 사과와 재발 방지”인지를 두고도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그래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여하튼 무력충돌의 참화를 막고 대화의 물꼬를 텄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로 편리한 대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고 서로 체면을 세우는 협상이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2조의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한-일 간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 합의도 그런 사례 아닌가.
남북이 의지를 보이는 것은 고무적이다. 박 대통령은 25일 “남북이 합의한 구체적인 사업들이 후속 회담 등을 통해 원활하게 추진”되도록 하자고 했고,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28일 “이번 합의를 소중히 여기고 풍성한 결실로 가꿔 가자”고 했다.
그러나 걱정도 앞선다. 사실 이번 합의 내용은 별로 충실한 편이 아니다. 1항의 ‘남북 당국회담’은 어떤 회담인지도 불확실하다. 남북이 이태 전 벌인 수석대표의 ‘급’ 논쟁을 재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6항의 ‘민간교류 활성화’는 5·24조치 해제 없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다. 아마 이번 회담에서 북한의 사과에 집중하느라 이들 문제를 협의할 시간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들 비군사 분야의 합의는 이번 회담의 의미가 지뢰 사과 문제 해결로만 비치는 것을 피하려는 포장용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래도 일단 5항의 ‘이산가족 상봉’이 새달 7일 남북 실무접촉을 하기로 하는 등 순조로운 것에 기대를 걸고 싶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이 남북관계 복원의 길을 여는 첫걸음이 되길 기대한다.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suh@hani.co.kr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