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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시인에서 프로그래머로 / 김우재

등록 2015-08-31 18:40수정 2015-09-01 10:31

시인은 독재에 항거했고 시대의 이정표가 되었다. 김수영은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연작시들로, 시를 시대의 살아 있는 말로 승화시켰다. 김지하는 <오적>으로 정경유착을 질타했고, 투옥되었다. 박노해는 <노동의 새벽>으로 노동운동에 불씨를 댕겼다. 시인만이 아니다. 소설가 황석영은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했다. 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작가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절반은 그들의 공로다.

시대가 변했다. 두 번의 민주정부와 두 차례의 경제위기, 이제 민주주의보다 집값과 자식 교육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중의 시대가 도래했다. 시인과 소설가는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독재에 저항하던 시절에 산다. 독재의 시절, 시인의 시와 노래는 건강한 종교적 열망이었다. 하지만 종교는 반드시 타락한다. 왜냐하면 종교의 내부에는 자기규제장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 변화에 저항하는 열망은 타락한 종교다. 시인과 소설가는 더 이상 시대의 등불이 아니다. 김지하가 박근혜를 지지한 우주적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시인의 종교적 감수성이 위험한 이유를 상기시켜주기엔 충분하다. 시대를 바꾸었던 종교적 열망은 변한 시대에선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유령이 된다.

고미숙, 강신주, 이지성
고미숙, 강신주, 이지성
철학이라고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다. 칸트처럼 위대한 철학자도 없고, 가라타니 고진처럼 세계가 인정한 현대철학자도 없지만, 우리에겐 수많은 철학장사꾼들이 있다. 고미숙은 현대의학을 너무 믿지 말고 역술원에 가보라는 인문학적 대안을 제시하더니, 직장인들에게 백수로 사는 법을 강의하고 있다. 강신주는 자본주의 체제의 상징물이 냉장고라고 말한다. 공유할 수 있는 음식을 이웃과 나눌 수 없게 만드는 이기적 욕망이 냉장고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단순한 방법은 냉장고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대안이라고는 독서, 글쓰기, 강연 외에는 알지 못하는 서생의 입에서 노숙자를 좀비로 비유하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젊은 세대의 인문학자라고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이지성의 유치한 리딩인문학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촉망받던 20대 논객들은 어느새 사라졌거나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항시인 김수영도 취하면 아내를 심하게 구타했다고 하던가.

이것이 인문학 자체가 지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문제가 기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유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은 길을 잃었다. 인문학이 길을 잃은 이유는 변한 시대를 인문학적으로 사유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시인은 혁명을 통해 나라를 구했다. 그 신념을 존중한다. 이제 우리에겐 혁명보다 사회를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엔지니어와, 종교적 신념에 매몰되지 않을 과학적 삶의 양식이 필요하다. 진보가 재탄생해야 한다면, 그 진보는 바로 이런 지식들로 무장한 집단이어야 할 것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국정원 해킹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 이준행은 저항시인이 아니다. 그는 독립 개발자의 길을 걸으며 조용히 한국 인터넷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오바마 캠프 엔지니어들의 선택은,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으며 사회의 변화에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집단은 누구인지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윈도10은 액티브 엑스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구글 크롬도 그런 방향을 따르기로 했다. 21세기 한국의 시인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일 것이다. 우리는 엔지니어와 과학자가 움직이는 사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실험 가능하고,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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