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제는 혁명이 잉태한 제도다. 함부로 형벌권을 휘두르는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와 불신에서 연원한다. 올해로 제정 800주년을 맞은 영국의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은 왕에 대한 견제장치로 배심제를 도입했다. “자유민은 동료 자유민들의 적법한 판결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감금·추방·몰수 등을 당하지 않는다.” 절대왕정 치하에서 사법권력의 전횡에 시달리던 프랑스 민중도 1789년 혁명과 함께 배심제를 도입했다. 1848년 독일 혁명으로 제정된 프랑크푸르트 헌법에도 정치적 사건 등에 대한 배심제가 규정됐다.
부침을 겪어온 배심제가 가장 강하게 유지되는 건 미국이다. 재판에 앞서 기소 여부까지 배심원이 결정하는 대배심제를 운용한다. 미국 국무부가 펴낸 사법제도 소개 책자에는 그 배경이 이렇게 설명돼 있다. “검사가 정치적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으며… 편견이 없는 공정한 시민 집단이 비윤리적인 검사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심제에는 시민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국가권력을 ‘동료 시민들’이 견제해야 한다는 도도한 저항의 정신이 배어 있다.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제가 일부 변형된 형태지만, 그 본질적 성격은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배심원의 만장일치 평결에 따라 ‘무죄’가 선고됐을 때 항소심에서 이를 함부로 뒤집지 못하도록 한 2009년 대법원 판례는 지당하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선거법 위반 사건 1심 재판에서 배심원 만장일치 평결에 따라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항소심 재판부가 이를 뒤집어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국민 의사에 반하는 판결이라고 반발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국가권력인 법관이 동료 시민들보다 피고인의 자유를 더 두텁게 보장한 것이니, 배심제의 정신과 어긋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이를 제도로 못박고 있다. 1심에서 ‘무죄’ 평결이 나면 검찰은 항소조차 할 수 없고 무죄가 확정된다. 반대로 ‘유죄’ 평결이 나면 피고인은 배심원의 오판을 주장하며 항소할 수 있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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