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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중독조직 / 김현경

등록 2015-09-21 18:44

<중독조직>(앤 윌슨 섀프·다이앤 패설 지음)은 알코올중독 가정의 모델을 조직문화 분석에 적용한 책이다. 조직의 수장 중에는 알코올중독이거나, 알코올중독은 아니지만 꼭 알코올중독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 걸핏하면 분노발작을 일으켜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자기의 의중 또는 심기를 파악하는 것이 경영진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버리게 하는 최고경영자(예를 들면 땅콩회항으로 물의를 일으킨 조현아 부사장)가 대표적이다. 그러면 그 밑에 있는 부하들은 사태를 수습하느라 쩔쩔매면서 점점 더 ‘동반중독자’같이 행동하게 된다.

동반중독자란 알코올중독자의 비위를 맞추어주고 그가 일으킨 문제들을 대신 수습해주면서, 결과적으로 중독 상태를 연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버지가 깬 술병을 치우면서 아이들에게 “아빠는 바깥에서 힘든 일이 많으셔서 그래.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하고 말하는 엄마가 여기에 해당된다.

보스가 알코올중독자처럼 행동해도 조직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헌신적인 동반중독자들 덕택이다. 이들은 보스의 변덕에 대응하고 외부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느라 바빠서 자기들이 원래 했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잊어버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조직이 내건 이상(안전하고 쾌적한 비행)과 현실(VIP를 위해 승객의 편의를 희생하는 것)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면, “조직은 원래 그런 거니까”라는 말로 덮어버린다.

동반중독자는 알코올중독자로부터 나머지 구성원들을 (혹은 조직 전체를) 보호한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실제로 동반중독자가 가장 열심히 보호하는 것은 알코올중독자이다. 알코올중독자를 보호하기 위해 동반중독자는 나머지 구성원들의 복리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땅콩회항 사건 당시, 승무원들에게 함구령이 내려진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것은 알코올중독 가정에서 엄마가 아이들에게 집에서 일어난 일을 절대로 바깥에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기회를 잃어버린다.

내가 뜬금없이 <중독조직> 이야기를 꺼낸 것은 땅콩회항 사건을 새삼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이 점점 더 알코올중독 가정을 닮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 집에서만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일들을 정상적이라고 믿으면서 어떻게든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불쌍한 아이들처럼, 우리 역시 ‘노력’과 ‘적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말이다.

살아남으려고 우리가 택한 전략들 역시 중독 가정 아이들의 수법과 슬프도록 닮았다. 이 책에 따르면, 알코올중독 가정의 아이들의 적응전략은 다음 네 가지로 나뉜다. 착한 아이가 되거나, 재롱둥이가 되거나, ‘날 좀 봐주세요’라고 외치는 반항아가 되거나,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면서 바깥으로 나도는 아이가 되거나. ‘착한 아이’는 자기가 착하게 행동하면 아빠가 술을 덜 마실 거라고 믿는다. 대통령을 비난하기 전에 국민이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 착한 백성들처럼 말이다. ‘재롱둥이’는 농담을 하고 재주를 부려서 우울한 집안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려고 한다. 말하자면 김연아나 박태환과 비슷한 역할이다. ‘반항아’ 유형은 말썽을 피워서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일베가 사용하는 전략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존재감 없이 지내면서 바깥으로 나도는 유형은 ‘헬조선’을 떠나려는 청년들을 연상시킨다.

김현경 인류학자
김현경 인류학자
이 책의 메시지는 이 모든 노력이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은 바로 알코올중독자이고, 그를 바꾸지 않고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김현경 인류학자

※ ‘야! 한국사회’ 필진에 새로 합류한 김현경 필자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와 문명’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올해 초 저서 <사람, 장소, 환대>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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