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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국정화 ‘조연’들의 역사 / 전정윤

등록 2015-10-13 18:34수정 2015-10-14 10:17

박근혜 대통령이 사랑하는 아이(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공부를 좀 잘했어야 했다. 8종 가운데 중간만 갔어도 괜찮았을 텐데, 8등이 뭐냐. 족집게 과외를 시켜도 안 되고, 어지간히 틀린 건 다 봐줘도 계속 꼴등이었다. ‘정상 국가’라면 재수를 시키든 삼수를 시키든 잘할 때까지 가르쳐서 상위권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아이 상태를 보니 경쟁해서 살아남기엔 싹수가 노랬다. 열 받은 대통령은 1등부터 7등까지 아예 시험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지난해 꼴등 한 아이를 데려다 슬쩍 이름만 바꿔서 1종 중 1등을 만들겠다는 게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다.

타임머신을 타고 1973년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무려 2015년에 ‘한국사 교과서 국정 전환 발표’ 기자회견 현장에 있게 될 줄이야. 이 글을 쓰고 있는 ‘2015년 10월12일 오늘’ 나는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주인공 마티(마이클 제이 폭스)처럼 정말 “백 투 더 퓨처”를 몇번이고 외쳤다. 그래 봐야 현실은 국정화. 미래에라도 누군가 찾아 읽으리란 기대로 ‘국정화 조연’들의 역사를 여기에 남긴다.

12일 오후 2시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김재춘 교육부 차관,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정부세종청사 브리핑룸으로 결연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5할은 의아함, 3할은 분노, 2할은 안타까움 같은 감정이 뒤섞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정화의 ‘국’ 자만 나와도 한없이 쪼그라들던 그분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모습에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은 ‘국정화 주연급’인데, 기껏 세종시까지 내려와 질문 하나 못 받고 돌아간 터라 오늘은 기록할 말이 없다.

김정배 위원장은 유신 시절에도 ‘국정화 반대’를 외친 사학자다. 그러던 이가 지난달 10일 교육부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로부터 국정화 ‘앞잡이’ 정도로 질타를 당했으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나 보다. 김 위원장은 이튿날 국편 공청회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국편이 국정으로 결정하는 기관인 것처럼 (중략)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있다”며 국편은 권한이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던 김 위원장이 12일, 한달 만에 돌변해 “어떻게 이루어진 민주화를 위한, 자유를 향한 역사 연구가 이렇게 이념의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는가”라고 강변했다. 군사독재 때도 국정은 안 된다던 학자가 이제 와 이념 편향성 탓에 국정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자기부정’을 한 셈이다.

김재춘 차관이 6년 전 영남대 교수 시절 국정화에 반대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김 차관이 연구책임자였던 보고서는 “국정 교과서는 독재국가나 후진국가에서만 주로 사용되는 제도”라고 짚었다. 그는 청와대 교육비서관에서 교육부 차관으로 들어온 지 10개월 만에 ‘임파서블 미션’을 완수한 에단 헌트(톰 크루즈)의 ‘표정’으로 “이념 편향” 운운했다.

국정화를 망설이다 결국 총대를 멘 황우여 부총리와 관련한 기록은 넘쳐날 테니 더 보탤 건 없다. 다만 기자회견장에서 나온 황 부총리의 고백은 꼭 남겨야겠다. “이 모든 것은 저를 비롯한 교육부의 책임인데 제가 혹시 (부총리) 자리를 뜨더라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저 자신이 그런 각오를 많이 했어요. 어디 가더라도 교과서 문제와 저는 떨어질 수 없구나.”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 쿠데타’는 길게야 못 가겠지만 일단 성공한 모양새다. 주연 혼자 영화를 끌고 나가기 힘들듯 조연들의 활약이 컸다. 세 사람이 왜 갑자기 국정화의 당위성을 ‘확신’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역사의 현장’에서 세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 있던 그 자리가 ‘가문의 수치’가 될 날은 머지않은 미래에 확실히 온다.

전정윤 사회정책부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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