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감국이 한창이다. 평소에 엄마는 노란 감국을 향해 “아버지 꽃”이라 했다. 엄마의 아버지인 내 외할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이라 한다. 꽃 한 송이에도 각자의 기억과 의미가 있거늘, 어찌된 노릇인지 툭하면 ‘국민’의 이름으로 호출하는 대상이 많다. 취향의 ‘국민화’에 늘 비딱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국민 배우, 국민 여동생, 국민 가수, 국민 드라마, 국민 작가, 국민 보약, 국민 꽃할배, 심지어 국민 팬티까지, ‘국민’의 행렬은 끝날 줄 모른다. 도대체 이 땅에 ‘개인’은 어디로 실종된 것일까. 자신이 태어난 날과 상관없이 모두 1월1일이면 단체로 나이를 먹는 ‘문화’도 있으니 개인의 의미는 탄생부터 지워지는 셈이다. 근래에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속에서 발견하는 광고를 보면 ‘나를 없애는’ 이 병이 점점 공식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이어질 때 나와 대한민국은 하나 됩니다.”(광복 70년 나라사랑 공익광고)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라를 꼭 지켜야만 합니다.”(한우 광고)
“가장 쉬운 나라 사랑은 국내여행입니다.”(한국관광공사 캠페인)
고기를 먹어도, 여행을 가도, 나라를 짊어지고 있어야 한다. 국가를 위한 국민만 덩그러니 있다. 나라를 위한 나는 있는데 나를 위한 나라는 없다. 나와 대한민국은 하나가 될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는 안 된다. 국민 이전에 개인이라는 한 사람으로, 나라가 없어도 나는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때부터 “국민이 하나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로 아주 일관성 있게 ‘하나의 집단’을 강조해 왔다. 올 초 영화 <국제시장>의 애국가 장면에 대한 발언부터 태극기 게양률을 높이라는 지시에 이르기까지 지독하게 ‘나 없는’ 나라 사랑을 강조한다.
하지만 현재 이 나라를 배회하는 시대의 언어는 ‘포기’와 ‘지옥’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라는데 정작 나라 안의 개인들은 ‘N포 세대’가 되어가고 있으며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른다. 3포, 5포, 혹은 7포까지 등장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포기의 목록은 점점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이념으로 나누어선 안 된다고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밥상은 나눠질 수 있는 나라라면 지옥은 지옥이다.
근대국가 이전의 나라에 대한 비하와 염증을 담은 ‘헬조선’이라는 언어가 처음에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제 ‘헬조선’에서는 일상의 한숨 소리가 묻어난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만 강요당하며 피폐해지는 개인들이 아우성치는 지옥이다. 개인의 능력이 부모의 상속을 넘어설 수 없는 시대이기에 아이엠에프 이전의 90년대를 그리워하는 집단적 향수만 커져 간다. 부모를 ‘갈아타려는’ 악한 인물(주로 악녀!)은 갈수록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이명박은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더니 박근혜는 아버지를 위한 나라를 만들고 있다. “아버지가 일으켜 세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나라 사랑은 박씨 부녀에 대한 충성과 별개가 될 수 없다. 애국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백성’으로 읽는)의 충성을 받아 제 아버지에게 효도를 한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내 나라’로 착각하는 그는 오늘날 상속의 시대를 가장 크게 누리는 인물이다. 혹시 이것이 ‘효테크’(부모에게 효도해서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인가.
분열과 갈등을 싫어하며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욕망은 엄청난 지배욕이다. ‘올바른 역사’는 하나가 아닌 역사다. 역사 기록이란 기억 투쟁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기억의 국정화다.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위해 각자의 역사를 소멸시키는 개인 말살의 정치를 하고 있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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