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 학기에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가르치고 있다. 소설의 모든 문장을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으면서 이로부터 미국의 역사에서부터 인간의 욕망, 나아가 사랑과 성공의 현재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제시하고 훈련하는 수업이다. 이미 이 소설을 읽었던 학생들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소설이라고 느껴져요.” 그렇다. 소설을 읽는 기쁨은 이런 것이다. 이미 읽은 소설이라도 다른 시간에 다른 상황에서 다른 해석으로 다시 읽을 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 읽을 때마다 새로운 생각과 감각을 주는 소설이야말로 위대한 작품이라고 일컬을 가치가 있다.
문학 비평에서 텍스트와 독자 혹은 비평가의 관계 역시 이런 것이다. 텍스트는 작가의 집필 의도나 관점에 의해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독자의 해석에 열려 있다. 독자의 읽기를 통해 비로소 텍스트는 살아있는 텍스트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 전체에도 해당되는 문제다. 역사(history)는 일종의 이야기(story)이며, ‘서사’의 형식으로 기술되는 ‘문학’(literature)의 일종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듯, 문학은 역사 속에서 생산될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역사의 알레고리이다. 나아가 문학과 역사는 공히 인간과 세상을 보는 철학적 관점을 담고 있으며, 철학은 흔히 문학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논의를 전개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5년 동안 국정을 위임받은 ‘한시적’인 정부가 한 나라 전체의 역사, 한 나라의 서사를 단 하나의 관점으로 볼 것을 강요하는 일이다. 어떤 선생이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자신의 관점을 ‘올바르다’고 말하면서 다른 해석은 모두 틀렸다고 강의한다면, 그런 강의는 당장에 없어져야만 한다. 그런 문학 강의는 역설적으로 문학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서사에 대한 관점과 해석과 비평 역시 같다. 역사는 뒤흔들 수 없는 사실과 변화하는 시대정신에 유연하게 열려 있어야 하며, 오직 그럴 때만 역사는 살아있을 수 있다.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된 이야기의 강요는 결국 이야기를 죽이는 일이다.
문학이 항상 열린 해석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영문학에서의 ‘정전논쟁’이 보여주듯이, 문학은 ‘가르칠 텍스트와 배제할 텍스트’를 나누는 정치적 입장이 싸우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의 문제는 언제나 관점과 관념을 장악함으로써 현실을 장악하려는 정치적인 문제다. 문학에서 이 정치적인 싸움은 학자들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정치적 입장 차이가 불가피한 문제라면, 그 입장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결국 학문적 자유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강요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사라지며, 그와 더불어 문학도 역사도 사라진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 예술의 문제이고, 민주주의의 생사에 관한 문제다. 결코 진보와 보수, 여와 야의 대립 문제가 아니다. 대학에 돈을 던져주면서 학문을 입맛에 맞게 재편시키고, 희곡과 영화와 미술을 사상재판으로 만들어왔던 이 대통령과 정부가 이제 드디어 역사를 하나의 해석으로 단일화하려 한다. 그 야만성과 천박성은 딱 그 정부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단지 냉소할 수만은 없다. 문학과 역사와 예술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지켜내는 것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와 직결된 헌법정신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역사교과서’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오직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견지해야 할 ‘올바른’ 관점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이슈국정교과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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