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이후 한국 정치의 지배적인 프레임은 세대갈등론이었다. 더 많은 불안과 위기에 놓인 젊은 세대가 결집해서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 야권이 선거 때마다 동원해왔던 전략이다.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세대갈등론은 ‘청년착취론’이라는 좀 더 자극적이고 세련된 형태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정치적 차원의 세대갈등론은 다른 세대의 반발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리스크가 높았다. 반면 일자리 문제를 핵심으로 삼아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호출되는 청년착취론은 기성세대의 부채감을 자극한다. 정치적으로 취약한 청년층에게는 따뜻이 손을 내밀면서 기성세대로부터는 양보를 얻어낼 수 있으니 여권으로서는 ‘양수겸장’의 세련된 전략이다.
모든 프레임은 현실의 일부를 과장하고 일부를 축소하면서 현실을 극화한다. 과장과 축소가 현실의 가장 치열한 대립을 적절히 담아낼 때 이 ‘왜곡’은 불가피한 숙명으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근년 발표되고 있는 일련의 데이터들은 세대갈등 프레임의 암묵적인 전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청년세대는 동질적이지도 않고, 하다못해 위기의식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지난 8월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의 청년 대상 조사 결과 하나를 보자. 물려받을 자산이 있는 중상층 이상 청년층의 무려 78.5%가 그들의 미래가 ‘희망이 있다’고 낙관에 차 있다. 이 수치는 중간층(67.9%), 중하층(55.3%)으로 갈수록 뚝뚝 떨어지다가 빈곤층에서는 ‘희망이 없다’(52.2%)는 절망 쪽으로 기운다. 부모 덕을 볼 수 있는 청년들에게 한국은 꽤 살만한 세상이다.
조사는 지금 청년세대가 한 집단으로 묶기 어려울 정도로 내부 격차가 크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 아득한 격차를 야기한 핵심 변수는 부모의 자산이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청년들의 삶의 기회가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노력에 따라 공정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도, 패자부활의 기회도 차별적으로 분배된다. 심지어 결혼, 출산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경험한다고 믿어온 생애주기상의 기본 통과의례조차 부모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갈라진다. 희소가치가 된 것이다. 인류사적 위기다.
요약하건대 지금 청년 내부의 격차는 세대간 계급재생산의 결과다. 오호영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고소득층 가구 자녀의 1~10위권 대학 진학 비율은 저소득층 가구 자녀에 비해 무려 8.6배나 높았다. 대학 서열에 따른 임금 격차도 명백하게 확인됐다. 왜 금수저에서 흙수저에 이르는 수저의 위계가 이 시대의 유행어가 되고 있을까? 이 명백한 계급재생산 구조를 대중이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갈등론, 나아가 청년착취론은 부자 기성세대가 가난한 청년세대를 착취한다는 이미지를 유포한다. 그래서 임금피크제 같은 발상이 먹혀든다. 빈곤한 자녀세대를 위해 좀 덜 빈곤한 부모세대가 죄책감을 갖고 양보하라는 논리다. 정작 풍요로운 금수저 집안이 양보할 몫이 무엇인지가 이 프레임에는 없다.
20세기에 1920년대, 1960년대, 1980년대, 세 번에 걸쳐 청년담론이 부상했다. 청년은 생물학적 연령이면서 시대정신의 표상이었다. 청년은 수구와 기득권의 저항에 맞서는 변화 지향을 상징했다. 청년은 사회변혁의 키워드였다. 지금의 청년담론도 그럴까? 그럴 리가. 지금의 청년담론은 한국 사회가 20세기에 시작한 하나의 순환을 끝내고 있음을, 공고해진 기득권이 성채의 문을 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세대갈등론은 시대적 효력을 다했다. 이제 불안하고 비루한 세대들, 연령을 넘어선 세대간의 연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hgy4215@hani.co.kr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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