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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 / 손아람

등록 2015-10-21 18:38수정 2015-10-21 21:14

2000년대 초반, 막바지 세대의 학생운동은 총체적으로 쇠퇴하면서도 여전히 여러 정파가 난립하고 있었다. 감정의 골은 꽤나 깊었다. 사회주의 계열 학생운동 정파에 몸담았던 선배가 민족주의 계열 학생 운동가들을 싸잡아 힐난하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그는 증오와 경멸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저 김구 같은 놈들!”

욕인가, 칭찬인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중등 교육과정의 역사 교육을 통해 내가 김구에 대해 배운 사실은 그가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임시정부의 절박하고 곤란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대를 거부한 극우주의자였고, 일본 관료를 암살했던 만큼이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암살을 무수히 사주하였으며, 완고한 반공주의자였다가 느닷없이 남북 공동정부 수립 쪽으로 돌아선 데는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승만과의 대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속셈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역사 교과서가 그런 것들을 가르쳐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극우주의자로서 김구의 면모가 공정하게 조명될 수 있는지 역시 누구도 보증할 수 없는 문제다. 공정한 역사적 조명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선택되고 해석된 사건들의 단위이며, 언제나 편향적이다. 알튀세르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인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역할이다. 이데올로기는 “나는 이데올로기다” 대신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 편찬된 1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는 이승만 집권 뒤부터 민주주의가 잘 실현되어 국민은 자유와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 아래 편찬된 2차와 3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서 이승만은 영구 집권을 기도했던 독재자로 격하되고 박정희의 종신 유신 체제가 능률적 국가 운영을 위한 결단으로 칭송되었다. 반면 전두환 정권 아래 편찬된 제4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박정희 유신 체제는 국민들의 비판에 거세게 직면한 실수였는데, 오히려 전두환이야말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역사는 종착점이 없다. 김영삼 정부 때 발간된 5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 의해, 전두환은 비리를 규탄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에 의해 권좌에서 끌려 내려온 대통령으로 ‘사실 개정’을 당하고 만다.

서로의 본질을 부정하는 저 양립 불가능한 사실들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역사가 늘 편향적으로 선택된다는 것. 뒤집어 말하자면, 역사는 선택지가 남아 있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편향된 역사가 아니듯이 좌편향된 역사도 아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세계, 해석의 다양성이 열려 있는 세계, 논쟁이 가능한 세계를 원한다. 역사가 존재하는 세계를 원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런 뜻이다.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단 하나의 허용된 역사가 아니라면, 나는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의 화신이고 박정희가 구국의 영웅이며 전두환이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지도자였다고 기록하는 역사 교과서의 존재를 지지한다. 여러 가능 세계의 하나라면 반드시 그런 역사관에 따라 쓰인 교과서도 존재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후손에게 역사가 누적된 취사선택의 결과물일 뿐임을 가르치는 데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종교적 해석이 범우주적인 외면 속에서 촌스러운 골동품으로 낡아가는 풍경을 보여주는 것만큼 완벽한 방법이 없을 테니까.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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