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덕수에게 박수를! / 김현경

등록 2015-10-26 19:28

지하철역 입구에서 채소를 팔던 할머니가 언제부터인지 안 보인다. 애호박을 사면 꼭 풋고추 몇 개를 덤으로 주시며 된장찌개 맛있게 끓이는 법까지 일러주시던 할머니. 다 합쳐도 만원어치나 될까 싶은 채소를 조그만 좌판에 늘어놓고 저물어가는 길거리에 하염없이 앉아 계시던…. 노점 단속반에 쫓겨난 것일까? 아니면 어디가 편찮으신가? 나는 어둡고 썰렁한 방에 혼자 누워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이는 평생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논일, 밭일, 산더미 같은 집안일, 어쩌면 식모살이나 공장노동….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도 그이는 아직 쉴 수 없다. 쌀을 사고 약을 사려면 몇천원이라도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아픈 몸을 이끌고 일거리를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된 건 이 할머니 같은 분들의 노고와 희생 덕택이 아니었나? 왜 대한민국은 이들을 고작 이렇게밖에 대우하지 못하는 것일까?

‘세대전쟁’의 프레임은 종종 노인빈곤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영화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란은 이 프레임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덕수는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내면서 가족과 국가를 위해 희생을 거듭한다. 그는 독일의 탄광과 베트남의 정글에서 청춘을 보내고, 불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눈물겨운 ‘아버지 노릇’을 정작 자식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자식들 눈에 그는 까다롭고 고집 센 늙은이일 뿐이다. 이 영화는 진보적인 평론가들에게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산업화세대를 지나치게 미화하면서 청년세대가 겪는 어려움을 무시한다는 것이다.(‘토 나오는 영화’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발전이 무수한 덕수들의 피땀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희생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닌가? 산업화세대는 대부분 궁핍한 노년을 맞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노인가구의 54.0%가 빈곤층에 속하며, 이들의 월평균 경상소득은 63만원에 불과하다.(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 ‘우피족과 푸피족’ 참조)

사실 ‘국제시장’의 이데올로기는 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바로 덕수와 달구의 우정을 묘사하는 장면들 속이다. 영화에서 덕수는 혼자가 아니다. 가는 곳마다 달구라는 충실한 친구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덕수와 달리 달구는 항상 운이 좋다. 베트남에서 덕수는 한쪽 다리를 잃지만 달구는 멀쩡하게 돌아오고, 덕수는 평생 조그만 구멍가게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달구는 큰 빌딩을 소유한 부자가 된다. 통계적으로 달구는 전체 노인가구의 6.2%에 불과한 ‘잘사는 노인들’(균등화 가처분소득이 중위소득의 150% 이상)을 대표한다. 이들의 월평균 경상소득은 580만원으로 빈곤층의 9.2배에 달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진짜 메시지는 이것이다─산업화세대는 모두 ‘하나가 되어’ 조국의 번영을 위해 일했고, 그들 내부의 격차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달구는 정말 언제나 덕수 곁에 있었을까? (덕수를 따라 독일에도 가고 베트남에도 갔다는 건 달구가 혼자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설령 그랬다 해도, 그들이 예전에 같이 고생했다는 사실이 지금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산업화세대의 노고를 치켜세우는 사람들은 덕수의 이미지를 달구에게 투영한다. 세대전쟁의 프레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반대로 달구의 이미지를 덕수에게 투영한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고 믿는다. 달구야 어떻든, 덕수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덕수에게 박수를! (그리고 채소 파는 할머니에게 연금을!)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1.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2.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3.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4.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5.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