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노예-과학기술인 선언 / 김우재

등록 2015-11-02 18:48수정 2015-11-02 21:06

최근 한국의 상황은 보수-진보의 대립도 아니고, 친일-종북의 대립도 아니다. 오히려 부활하려 애쓰는 국가주의와 이에 대항하는 민중의 절규에 가깝다. 정부가 여당을 쥐락펴락해도 저항이 없다. 아이들이 죽고, 사람들이 전염병에 쓰러져도 정부의 변명을 지지하는 국민이 절반이다. 북한이나 채택하는 국정교과서를 뻔뻔히 들고나오는 대통령이 묘하게 자연스럽다. 파시즘의 전조다.

세계과학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는데 전혀 몰랐다. 과학자들은 관심도 없는 그들만의 잔치다. 회의 내용보다 화제가 된 것은 ‘과학기술 혁신과 미래창조를 위한 우리의 다짐’(이하 ‘다짐’)이라는 글이었다. 우연히 읽은 ‘다짐’은 지금이 2015년인지 의심하게 할 정도로 유치했다. 과학기술은 국가발전의 핵심이니 과학기술인들은 창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국민 행복에 기여하자는 내용이다. 다른 선언문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이 하나 있는데, “국가번영의 원동력은 강력한 리더십에 있음을 주목하고, 과학적·합리적 국정운영을 펼치도록 적극 협조하고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이다. 누가 봐도 과학기술인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적극 협조하고, 그 리더십에 동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국가의 노예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과학기술인들의 국가주의와 과잉충성은 박정희 시대를 기원으로 한다. 박정희 시대에 국가의 모든 요소들은 중앙집권적 통치를 위해 재편되었고, 과학기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유학했던 젊은 과학세대, 훗날 파이클럽이라 불리는 이들이 대학교수들을 제치고 박정희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정치세력과 젊은 과학세대가 손을 잡았고, 과학기술은 국가주의에 편입된다. 연구의 중심은 대학에서 정부출연연구소로 전환되었고, 군사관료들이 과학기술인들을 직접 관리했다. 박정희는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었고, 과학기술자들의 모든 성과를 착취했다. 이렇게 한국 과학기술의 부흥은 모조리 박정희에게 귀속되는 착시효과가 생겼다.

이번 회의에서 전국대학생창업동아리연합 회장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과학기술 발전도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무지다.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고, 특히 그 발전의 치명적 결함을 놓쳤다. 그것이 한국이 여전히 과학기술의 질적 도약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다. 선진국의 젊은 창업가들은 정부의 돈에 기대지 않는다. 가장 혁신적이어야 할 창업동아리 회장이, 정부 행사에서 용비어천가나 부른다면 미래야 뻔한 일이다.

물론 정부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이처럼 철저히 인식하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늘리고, 연구역량의 강화를 위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과학기술자들이 관료들을 상대하느라 시간낭비하지 않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하지만 세계과학정상회의에서 채택된 대전선언문은 과학기술자들에게 명령하는 과도한 의무로 가득하고, ‘다짐’은 그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노예들의 용비어천가다. 과학기술자들의 권리와 처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중요한 행사가 대중에게 노출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언문을 최양희 정도의 인물이 읽으니 파괴력이 없는 것이다. 선친의 뜻대로 다시금 국가주의를 과학기술과 융합하려면, 박정희 시대의 최형섭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떠오르는 인물은 한 명뿐이다. 황우석, 그를 다시 소환해야 한다. 그것이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성공하는 지름길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선친의 시대부터 과학기술의 걸림돌은 국가주의였다. 그런데 그 걸림돌이 또다시 문제를 풀겠다고 한다. 될 리 없다. ‘다짐’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일동의 이름으로 낭독되었다. ‘다짐’에 동의한 적 없다. 나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이 아니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1.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2.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3.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4.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5.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