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 자객 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됐다. 흔히 이 사건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극적 묘사일 뿐 엄밀한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해석은 아직도 분분하다. 경제적 배경만 살펴본다면, 당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기존 제국주의 열강과,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신생 열강 사이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을 원인으로 꼽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이는 일반적인 시장주의자들의 가설과는 어긋난다.
세계화의 이점을 강조하는 이들에게는, 상품과 자본 이동의 국경 간 장벽이 낮아지면 세계는 자연스럽게 경제번영과 평화의 길로 나아간다는 사고가 뿌리깊게 박혀 있다. 미국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1999년에 낸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맥도널드가 있는 곳에는 전쟁이 없다”며 무역과 투자의 확대가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세계화의 전쟁 억지 효과 가설인 셈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이런 주장과 결정적으로 배치되는 역사적 증거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40여년 동안 세계적 경제통합은 빠르게 진행됐다. 1913년 국내총생산(GDP)에서 상품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라별로 보면 영국은 17.5%, 독일은 16.1%로 지금의 미국보다 더 높았다. 201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가 측정한 1900~1914년의 세계 자본이동지수는 2000년대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인류가 겪은 전쟁 가운데 가장 참혹한 전쟁이 벌어졌다.
1차 세계대전은 전사자 900여만명을 포함해 3천만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남긴 채 1918년 초겨울 프랑스 파리 근교의 콩피에뉴 숲 속 열차 안에서 독일과 연합국 대표단이 휴전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지금으로부터 97년 전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박순빈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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