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펜스의 대가’ 히치콕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영화화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원작이 있는 2차 창작물의 경우 본래 그 원작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기가 여간 쉽지 않다. ‘성스러운 텍스트’는 더욱 그렇다. 영화 <노아>는 성경을 왜곡하고 반기독교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대중은 하나가 아니며 ‘대중의 공감’이 창작의 지표가 되어선 곤란하다. 표현의 자유는 “대중의 공감하에 이뤄지는” 영역이 아니다. 대중의 공감 여부와 관계없이 제도적 검열과 탄압에서 창작을 지키기 위한 개념이다.
올해 초에 팝 가수 시아는 ‘엘라스틱 하트’의 뮤직비디오에서 열세살 무용가 매디 지글러를 성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비판 때문에 사과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글러가 ‘늑대 소녀’를 연기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가수 아이유의 새 음반을 두고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과 비슷하게 ‘소아성애’를 운운했다. 아이유도 비판이 일자 직접 사과했다. 음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윤리적 심판 앞에서 사과하지 않고 버티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가수가 직접 사과까지 한 아이유의 ‘제제’는 새롭지 않고 내게는 흥미롭지도 않은 노래다. 나의 ‘편협한’ 기준으로는 딱히 ‘재해석’이라고 할 만한 ‘해석’도 없다. 빈곤과 학대를 보며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라고 쓰다가, 이러면 안 되지? 라는 자기검열이 시작된다. “예술에도 금기가 존재해야” 한다거나 음원을 폐기하자며 서명운동을 하는 황당한 모습 앞에서 일단 ‘표현의 자유’를 강조해야 한다. 작품의 미학적 논의는 윤리 앞에 꽉 막혀 버렸다. 창작품을 두고 윤리의 언어가 앞서 나가면 작품의 미적 평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말하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우리는 ‘표현’의 개념과 범주를 논하거나 창작품의 완성도와 발상에 대해 평하고 감상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대신 그 표현을 지키느냐 버리느냐를 선택할 기로에 놓인다. 창작과 비평이 함께 망해가는 길이다.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오래 생각을 숙성시킬 필요가 있건만, 과격한 반응 때문에 뻔한 말만 반복해야 한다. 여러 관점의 비평이 아니라 지지와 반대라는 양 진영으로 나뉘어야 하는 상황이 언제나 불편하다. 제도적 규제와 비판적 의견을 혼동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비판받지 않을 권리가 아니듯이, 비판할 자유가 작품을 폐기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니다.
결국 어떤 창작품을 이 사회에서 삭제하고 말겠다는 의지는 단지 그 작품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수많은 담론들을 함께 묶어 폐기처분하겠다는 무서운 발상이다. ‘창작의 고통’을 운운하는 작가가 남의 창작에 대해서는 쉽게 ‘폐기’를 외치는 모습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각종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잘’ 만들었는지에 대해 논해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연결시키면서 음악은 어디로 가고 범죄를 옹호하느냐 마느냐가 되었다. 1984년 세르주 갱스부르가 당시 열세살인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와 부른 <레몬 인세스트>가 근친상간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 음악 때문에 근친상간이 늘어났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라진 홍대 근처의 실험예술극장 씨어터제로가 건물주의 퇴거 명령으로 2004년에 처음 폐관 위기를 맞았을 때 씨어터제로를 살리기 위한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한 연극인의 말을 늘 되새긴다. “문화가 풍성해지려면 누드(퇴폐)도 있어야 하고, 카페(담론)도 있어야 하며, 클래식(순수예술)도 있어야 한다.” 함부로 폐기를 말하지 말길. 풍성하게 비판하고 싶다. 창작자는 쉽게 사과하지 말고.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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